사진 출처 : 맥심 코리아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JY6UylCPFB8)


젊고 예쁘며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여성이 DJ 부스 위에 선다. 어디를 봐도 눈에 띄는 외모와 몸매다. 그런데 보통 디제이들과는 조금 다른 행동을 한단다. DJ 덱 앞에서 뜬금없이 한 바퀴 돌고, 자신이 만들었다는 춤을 춘단다. ‘피리춤’이라나, 아무튼 그녀의 시그니처 댄스라고 한다. 그녀의 영상에는 많은 악성 댓글이 달린다. 그녀를 욕하는 사람도 매우 많다.  DJ라면 무엇보다 음악에 집중을 해야 하거늘, 그녀의 부족한 음악성이 문제라고 한다. 사람들을 춤 추게 만들라고 했더니 자기가 춤을 춘단다. 뭔가 한다고는 하는데 쓰레기같고 허접스럽단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다를 욕하는 주된 이유다.


여성 혐오의 극단이 창녀 혐오라면, (창녀 혐오는 남성(주체)-여성(객체)으로 나뉘는 젠더 이분법에서 남성 주체의 성적 욕구 해결 ‘도구’로서, 여성 객체의 주체성이 완전히 상실됐을 때 성립한다. 창녀는 남성의 권력욕과 지배의식에 완전히 굴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DJ 소다는 창녀 혐오의 기믹(gimmick ; 술책)을 전면적으로 사용한다. 음악보다는 비주얼의 섹슈얼함에 집중하며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출이 심한 옷을 즐긴다 (그녀의 취향이자 콘셉트인 것 같다). PC 화면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비주얼로, 남성 판타지가 내면화된 섹스 어필을 꾀한다. 소다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과하게 좋아하거나, 과하게 싫어하게 만든다. 혹은 좋아도 싫어하는 행동을 취하게끔 한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자극적이다.


DJ 소다에 대해 일률적이고 극단적인 욕설이 쏟아지는 현상, 나는 이것을 ‘소다 혐오’라고 부르고 싶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와 미모에 드러난 극단의 여성성에는 열광하면서, 동시에 디제이로서의 실력이 부족하고 미숙해 보이는 행동 패턴에 대해서는 입에 불붙은 듯 화를 내는 사람들의 이중적 반응 때문이다. 주로 실력이, 때로는 외모가 욕을 먹는다. 대체로 둘 다 욕을 먹는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욕을 먹는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 발언들의 발화자 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나는 그녀를 혐오하는 다수 남성들의 반응에서, 우습게도 마누라와 여자친구 몰래 유흥업소에 다니는 동시에 ‘성 노동자 여성’이 팁을 달라는 요구에는 거칠게 불응하는 성인 남성들의 이중적 모습이 연상되었다. 음악도 못하는 저런 야하고 천박한 여자 디제이’년’은 관객을 신나게 해주는 것에나 집중하면 될 것을, 혹은 ‘업소’에서 가만히 내가 명령하는 대로만 순응하면 될 것을, 그녀는 굳이 ‘주체적으로’ 커다란 가슴을 흔들어대며 무대의 질을 떨어뜨린다. 한 마디로 예상치 못 한 행동으로 오빠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정말로 그녀가 도덕의 절대 가치에 어긋나거나 법에 저촉되는 죄를 지었다면 사회에서 ‘매장’당하거나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게 수순일 텐데 왠걸, 그녀의 몸값은 줄곧 상승하고 있는 모양이다. 근래는 동남아 클럽 시장에 진출했단다. 유명 포털 사이트가 만든 VOD 어플리케이션의 실시간 방송에도 출연했단다. 현실이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공연/행사 산업의 수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녀를 매장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분노가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설마 겉으로는 무지막지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뒤에서 은밀히 그녀의 영상을 챙겨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그녀를 죽일 듯이 욕을 하던 사람들이?


이쯤 되면 그녀를 욕 하는 동시에 영상을 찾아보는 이들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굳이 추측하자면, 막장 드라마를 보는 심리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드라마 전개의 극적 구조와 부족한 당위성에 쉽게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단발적인 재미와 말초적 흥미 때문에 그것을 본다. 욕을 하면서도 계속 본다. 뒤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표독스러운 드라마 속 ‘악녀’는 종종 액받이 무녀가 된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욕은 어떤 형태든 쉽게 용인된다. 가상 세계라는 안전한 보호막 속의 절대 악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정해서 때리는 것은 부담이 없고 대체로 재미있으며 중독성을 지닌다. 그것이 폭력의 중독성이다. 만약 대상이 악을 자처할 경우, 즉 욕먹을 짓을 할 경우 욕의 정당성은 쉽게 확보된다. ‘한 놈만 팬다’는 말은 대상에 대한 ‘나’의 절대 권력을 뒷받침한다. 


오히려 소다의 행보와 의도는 TV 드라마처럼 쉽게 읽히는데, 그녀의 ‘죄질의 막중함’을 논하는 남자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디제이는 자고로 음악적 감수성도 뛰어나고, 뭔가 있어 보이는 ‘형님’이 해야 하는데, 왠 ‘어린’ ‘한국’ ‘여자애’가 디제잉 하랬더니 춤이나 추고 되도 않는 백 스핀이나 하며 돈 벌어먹는 게 오빠들은 괘씸한 것일까. 만약 소다를 향한 일관적인 남성들의 분노가 우리 공연 문화의 퀄리티 상승을 꾀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사명감의 발로라면, 그래서 마구 ‘나대는’ 소다에게 오빠들이 진중한 마음으로 따끔한 꿀밤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거라면, 그네들의 공연 문화에 대한 투철하고 자발적인 애정 정신을 독려하며 문화관광부에서 표창장이라도 내려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녀는 어쩌면 본의 아니게 젠더 전복의 아이콘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표현된 통념적 여성성에 대한 남성들의 이중심리를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은 의도적이든, 의도치 않았든 성공적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극렬한 혐오는 극단적 애정의 뒤틀린 증상일 때가 많다. 소다는 네가티브하고 말초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절대 악으로 취급되길 원하는 남성들의 집단 심리적 역풍으로 톡톡한 금전적 수혜를 얻었다. 이 글을 쓴 뒤 DJ 소다의 리믹스 트랙을 들어보려 한다. 그녀는 나이키 조던 마니아라고 한다.





내가 알기로 정이현이란 작가는 신경숙만큼(?)이나 유명하고+독자의 호불호가 뚜렷한 작가다. 사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회사 앞의 퀴퀴한 도서관에서 조우한 <달콤한 나의 도시>와의 만남은 반갑고도 알쏭달쏭했다. 작품을 읽기 전, 드라마는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등장인물의 외모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상상보다는 대입에 더 가까웠지만) 자꾸 지난 기억이 캐릭터에 대한 상상을 방해하는 바람에 슬며시 짜증이 샘솟기도 했다. 이래서 극을 본 후 원작은 읽는 것은 좋기도 싫기도 하다.

작가들이 자주 부정하는 게 있다면 등장인물과 원작자를 동일시 하는 관점일 터다. 하지만 정이현이라는 작가는 쿨하게도 작가보다는 오은수가 먼저 읽히고,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와, '쿨내난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혹여나 작가 후기가 단행본 출간 직전에 쓰여진 거라면 소설의 반응을 다이렉트로 얻으면서 이미 '넌더리'가 날대로 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이 소설은 J모 일보에 장기연재되었다.) 오은수의 뒤에 서고 싶던 작가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정이현은 초월적 소설쓰기에 통달한 대인배이거나, 사람에 질린 30대 여성이거나 둘 다 일 것 같다. 

30대가 되어도 지속되는 노골적 방황이 20대인 나의 살갗에 와닿는 기분은 짜릿하고도 홧홧했다. 이것이 20대를 위한 소설이라면 주인공 은수는 태오와 영수 사이에서 밀고 당기기를 하며 자존감 상승을 맛보았을 테지만 소설을 달랐다. 결말에서 묵묵히 홀로 떡볶이를 먹고 카페모카를 사먹는 은수의 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당연하게 느껴졌달까. 사회초년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랜 직장 생활을 해온 올드미스에 대한 경외심이 솟았달까. 아직 가지 않은 길을 다녀온 뒤 숨을 돌리는 그녀들을 보는 나의 눈은, 여권없는 고등학생이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촌 언니를 부러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죽도록 누군가에게 사랑받지도 않고,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는 그녀들은 올 겨울도 알파카 코트를 입고 MCM 가방을 든 채 충혈된 눈으로 도시형 고속버스를 탈 것이다. 뿌연 성에가 낀 종로의 밤거리. 입김을 불고 불어도 자꾸 뿌옇게 김이 차고 마는 기나긴 겨울. 그녀들의 30대란 교복쟁이들처럼 성에낀 버스 창문에 낙서를 하기 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나이인걸까. 여자의 30대란 꽃이 만개한 시기일까, 아직 개화기인지 장담할 수 없는 나이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자 문득 얼굴이 홧홧해지면서 멀지 않은 나의 30대가 슬금슬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들에 덤덤해지기엔 아직은 어설픈 20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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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 본문 중에서

  정한아의 글은 밝고 명랑하다.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무엇보다 젊다. 등단작 '나를 위해 웃다'때부터 그녀의 젊음은 항상 정직했다. 방황은 하되 비겁하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공중에 붕붕뜨기도 하고 리드미컬하게 춤도 추었다. 그렇게 성장한 서사는 결국 복숭아씨처럼 알차고 단단한 진실과 마주했다. 참, 다행이었다.

  이렇듯 건강하고 강인한 그녀의 글도 과거에는 치기어린 방황의 시절을 겪었을 테다. 그러한 것들에서 한 발짝 물러선 글 속에 사람의 향기가 앞선다. 무지와 무관심, 혹은 자의식 과잉과 지적 허영심 속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오늘날의 20대를 위한 지침이 정직하고 꼼꼼한 문장 속에 한 땀 한 땀 녹아있다. 이런 소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머릿 속이 온통 세상에 대한 설익은 분노로 점철되었던 그 때

내 나이 또래 여자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점점 동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던 요즘이었다. 가방에는 아이팟 터치 2세대나 아이스크림 폰을 담고, 한 손으론 유니클로(Uniqro)나 아메리칸 어패럴(American Apparel)의 쇼핑백을 메고서 남자친구와 신사동의 '핫 스폿'이라는 곳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커피나 맥주를 마시고 헤어지는 식의, 루트가 뻔한 데이트 코스들. (숨이 차다) 그 속에서 '저런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며 '무심한듯 시크한척'하고 싶었던 나는 '읽어야지'라고 생각만 했던 김사과의 장편소설 <미나>와 만났다. 아니, 재회했다.

학교를 다닐 때 '이 책이 아니면 글쓰는 사람이 아니죠'라는 말에 냉큼 3년치를 신청했던 한 문예 계간지 속에서 김사과라는 작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나로 하여금 대학교 3학년이라는 신분으로 데뷔한 소설가 한유주와 더불어 '그야말로 엄친딸이구나'라는 느낌을 매우 강하게 주는 작가였다. 짧게 인터뷰한 기사만 봐도 그녀는 외고를 자퇴하고서 검정고시를 통해 천재 아니면 또라이만 모인다는 한예종에 간 데다가 '영이'라는 파괴적인 소설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한, 어마어마하게 길고 화려한 수식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데뷔작 <영이>를 만났을 때도 나는 쉽게 소설의 호불호를 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등장은 한 마디로 '교란'이었다. 

소설 속에는 소위 엄친딸이라 불리는 여고생 '미나'와 그녀만큼 표면적으로는 잘난 여고생이나 미나로 인해 태생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수정'이란 두 인물이 등장한다. 친구의 자살에 학교를 자퇴하고 대안학교를 다니게 된 미나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창 사춘기인 수정의 관계 또한, 소설 전체의 명징하지 않은 메세지만큼이나 묘하다. 애증을 넘어서, 질투를 넘어서, 설익은 분노를 넘어서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 마무리되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농밀한 내러티브는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로 하여금 개운함보다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교복을 입던 시절의 기억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추억이다. 나부터가 몇 년 전에는 소설 속의 소녀들처럼 길거리에서 파는 스타킹마냥 흔하게 널린 여고생떼 중 하나였기 때문일까. 고3 당시, 수능을 보고나서 한 학교는 보기좋게 떨어지고, 20점 하향한 학교도 어이없게 떨어지고, 희망을 갖고 있던 마지막 학교에서 예비번호 한 자리 수를 받는 3연패를 경험한 나. 나 또한 제도의 무수한 피해자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때의 '3연패'는 나라는 인간의 20대 초반을 지배하는 피해망상을 고밀도로 증폭시키는 사건의 발단이었던 듯 하다. 재수를 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흘려들은 채 (당시 나는 무엇보다도 수험생이란 끔찍한 직업을 다시는 갖고 싶지 않았으며, 집안 형편 또한 재수를 할 처지가 못되었다) 단지 전공만 보고서 이름 없는 전문 대학의 추가 모집 원서를 집어넣었다. 학교 생활은 밋밋하단 것 빼고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 나름대로 칭찬도 받고 상도 타며 잘 다녔다. 물론 남들처럼 적당 농도 이상의 재미가 가미된 대학 생활은 즐길 수 없었지만 말이다. (MT도 한 번도 가지 않았고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남자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했던 지독한 아르바이트에서 벗어나 도서관에 가거나 음악을 들으며 서울의 이 곳 저 곳을 홀로 탐방하고 다니는 게 당시 나의 가장 큰 낙이었다. 용기를 내서 음악 동호회로 몇몇의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시를 쓰게 되었고 소설을 가끔씩이라도 찾아읽었던 게 그나마 그 때 잘한 거라면 잘한 일일까. 아무튼 '대학생의 특혜'라는 것을 여유롭게 누리기에, 내 캠퍼스 라이프는 너무 춥고 어두웠으며 가난했다.)

그렇게 내 10대와 20대의 길목은 피해 망상만 가득한, 세상에 대한 설익은 분노로 가득찬 시절이었다. 그 피해의식은 지금도 미처 씻어내지못한 라면 찌꺼기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나. 나아진 것은 없지만 그것들은 모두 지나갔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고 있다. 미나와 수정을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지리멸렬한 과거와 작별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어쩌면 적지 않게 위안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수능 시험을 보기 전날, 나는 새벽 2시까지 끙끙거리며 울었다. 요즘도 자주 고등학생이 되거나, 수능 시험장에서 시험지를 푸는 꿈을 꾸는 나에겐 씻을 수 없는 그 때 이후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 나는 10대 시절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겪고 실패도 하고 상처도 받았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내가 밟고 지나온 돌들이 모두 디딤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부터가 내가 이제 어느 정도는 철이 들었다는 의미였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나에겐 철이 든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기준이 없다. 예전과 별로 달라진게 없는 2008년의 나는 그저 <미나>의 책장을 덮으며 회색 시험지처럼 쓸쓸했던 모노톤의 추억들을 상기할 뿐이다. 지금도 인공 닭장에서는 수많은 무정란들이 태어난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알들의 숨구멍은 외부의 힘에 의해 철저히 막혀있다.

하이퍼리얼리티를 표방한듯한 서사와 지적 사고가 거세된 듯한 소녀들의 구어체가 짬뽕되어 낯설은 이야기로 탄생한 <미나>. 책 속에서의 미나와 수정은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잠바와 아디다스 가방처럼 유행조차 재단된 시대를 살아가는 소년소녀를 표방한다. 80년대에 태어난 독자들이 두 소녀들을 통해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일이 결코 낯설지 않듯, 미나가 수정을 칼로 난자하는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지만 소설의 전체 흐름을 따져본다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비상식이 상식보다 더 상식적인 것으로 통하는 세상 아니던가. 미나와 수정이 당한 세상의 폭리에 비하면 수정의 손을 거친 미나의 죽음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제도의 시스템 내에서 영리하게 적응하나, 끝까지 지독한 기계로 남았던 미나가 천진할 정도로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서, 작가는 수정의 칼자루를 통해 세상을 조소하는 것이다. 이는 어른들이 '철없는 고딩들의 치기와 피해의식 과잉'이라고 치부하고 싶어하는, 더럽고 추잡한 세상의 단면 자체를 보여준다.

작가의 문체는 충분히 쿨하지만 쿨한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어를 가지고 노는 장난만 배운 일부 풋내기 작가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그녀는 찌고 쪄서 충분히 익혀낸 문장으로 세상의 목을 영리하지만 안전하게 비튼다. 사색이 사치가 되고 맹목적인 소비가 시대정신이 되어가는 현재, 폐부를 찌르는 그녀의 이야기들은 파괴적이고도 젠틀하다. 소설은 독자에게 독자가 느껴야하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은 미나와 수정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위로해주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토록 충격적인 엔딩은 독자가 감상평을 남길 틈마저 일찌감치 거세해버리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이들에겐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나>의 결론엔 일말의 동정심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 이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쓸쓸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GOOD

1. 지금-오늘을 살아가는 소녀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작가의 영상미 넘치는 필력.

2. 세상의 구조에 대해 비판하는 수정의 심정에 대한 파워풀한 서사.

BAD

1. 수정과 친구-연인 사이의 관계이자 미나의 친오빠인 민호에겐 뚜렷한 역할이 없다. 수정이 애증하던 엄친딸을 칼로 죽였다는 걸 이해하고 나면, 자기 친여동생 죽은 걸 보는 10대 소년의 태도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친오빠 맞아?

2. U2나 라디오헤드, 피오나 애플, 뷔욕 등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형과 누나 스타일'의 음악을 즐겨 듣는 소녀들의 대화 치고는 끝없이 가벼운 '수정'과 '미나'의 수다들. 차라리 빅뱅이나 원더걸스라고 하는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3. 어린 애들이 담배를 너무 자주 태우는구나. 어차피 속담배는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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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플리커. 상기 이미지는 내용과 무관합니다)

흔히 전시라고 하면 단순히 그림을 보거나, 조각품을 보는 것에 한정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최근 전시의 경향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눈을 감는 것을 넘어서 코로 냄새를 맡고 손으로 꾹꾹 눌러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여기 여름 방학을 맞이해 온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두 가지 전시가 있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참여형 전시를 소개한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신촌 아트레온 <어둠 속의 대화>전


하루하루 생활을 견뎌내기에 바쁜 현대인들이 완전한 어둠 속에 빠져본 경험이라고는 잠자리에 누울 때 뿐 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깬 상태로 자신의 손마저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 빠져본 경험을 해 본 이는 얼마 없을 터다. 거리의 네온사인, 자동차 불빛,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의 현란한 화면까지 세상에는 우리의 눈을 쉬게 하는 것보다 지치게 하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여기 더운 날씨 탓에 일상의 사소한 불쾌감마저 컨트롤이 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게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전시가 있어 화제다. 흔히 ‘전시회’라고 하면 화려한 그림과 멋들어진 조각품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지 말자. 이곳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완전한 어둠’ 뿐이다.

<어둠 속의 대화>는 기획자와 참여자의 경계를 허문 참여형 전시로 21년째 계속되는 중이다. 1988년 사고로 시력을 잃고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했던 저널리스트에게 감동 받은 독일의 박사 안드레아스 하이네케에 의해 창시된 이후 전 세계 130개 전시장에서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현재까지도 8개의 상설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로 각국의 꾸준한 호응을 얻어 왔다. 국내의 인기도 계속 되어서 2007년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시작한 결과, 최근 신촌 아트레온에서 3차 전시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오직 캄캄한 어둠뿐인 이 전시의 관람객 중 98.9%가 ‘내 생의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게다가 전체 관람객 중 절반 이상이 1번 이상 관람한 사람이라고 하니 대체 ‘완전한 어둠’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 인간에게 대체 얼마나 큰 자극을 안겨주는지 건지 ‘안 봐도 비디오’다.

전시를 관람하는 약 60분의 시간동안 관람객에게 앞을 볼 수 있는 권리는 완전히 배제된다. 이에 참가자들은 오직 안내자의 목소리에 의지한 채 지팡이 하나를 짚고 나아간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셈. 어떤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꼬마는 앞이 안 보인다며 엄마부터 찾는 등 갑작스러운 어둠에 처음에는 불안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이들은 인간의 오감(五感) 중 커다란 한 감각이 차단됨으로 인해 나머지 죽어있던 감각을 사용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이는 마치 한 소년이 오감 외의 숨겨진 감각을 찾아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 <식스 센스>를 연상시킨다. <어둠 속의 대화>는 진화하는 전시다. 오감 뿐 만 아니라 공기, 압력, 온도를 느낄 수 있도록 다채로워졌다. 세계 각국의 사랑을 쑥쑥 먹고 자란 결과 550만 명의 관객을 울렸고, 이제 한국에서 더 많은 이들의 가슴에 펌프질을 할 예정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후의 감동, 좋은 책 한 권이 주는 여운 그 이상의 후폭풍이 여기 서 불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발을 옮겨보자. 당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둠의 문턱을 향해.
 

Info 2008.6.20 금~ 2009.2.22 일, 신촌 아트레온 13층 전시실, 예약 시 성인, 청소년 20,000원, www.dialogue-in-dark.com

Tip 관람을 원한다면 티켓링크에서 온라인 예약 신청을 해야 한다. 또한 사방이 깜깜한 탓에 전시관람 전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이뤄진다. 반드시 예약 시간 15분 전에 체크인할 것.


휴대폰으로 배우는 현대 미술

어울림 미디어아트 체험 전 - 그림자가 따라와요


요즘 아이들에게 컴퓨터는 필수, 휴대폰은 기본, 게임기는 옵션이다. 이러한 미디어 기기들의 용이한 접근성에 비해, 이에 대한 사전 교육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아이들은 미디어가 둘러싼 환경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노출되어있고 때때로 이는 게임 중독, 컴퓨터 중독 등 이른바 ‘미디어 중독’이라는 사회적 징후로 나타난다. 학부모들의 불안이 날로 증폭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특효약처럼 등장한 전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미디어 기기의 순기능을 살려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 뿐 만 아니라 현대 미술에 대한 공부까지 돕는 <어울림 미디어아트 체험전 - 그림자가 따라와요>가 그것이다.
모든 전시물은 미디어 아티스트 최승준의 작품으로, 그는 물리학을 전공하다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입문한 후 예술, 교육, 비즈니스를 종횡무진 하는 전방위 작가다. 집안에서 유치원을 운영해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그의 전시는 ‘쌍방향 소통’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참가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폭이 상당히 넓다. 뭐든지 눌러보고 만져보기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전시회장으로 들어가면 5개의 방이 있다. 각 방에는 ‘그림자’를 주제로 한 10개의 미디어 작품이 전시되어있다. ‘그림자와의 만남’, ‘그림자와 떠나는 바다여행’, ‘그림자와 함께 숨은 그림 찾기’, ‘소리의 벽과 거인 그림자’, ‘추억이 된 그림자’까지 재치 있는 방들의 이름들이 눈길을 끈다.

첫 번째 방에서는 전시장에 있는 내내 자기 자신을 쫓아다니는 그림자와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벽면에 설치된 라이트 박스에 자신의 몸을 비추자 내 동작을 똑같이 따라하는 그림자가 생긴다. 두 번째 방에 가자 나의 그림자가 화면 속에 들어가 있다. 그림자는 풀숲 뒤에서 벌레들과 함께 놀거나, 바다 위를 떠다닌다. 세 번째 방에서 특수조명을 받으며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그림자는, 네 번째 방으로 들어가자 키가 5m로 쭉 늘어나 서로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방에서 관람객은 터치스크린 위에 전시 소감을 남기며 그림자와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이러한 전시 외에 눈여겨 볼 게 하나있다. 이는 작가가 직접 진행하는 <스크래치 워크숍>으로, 전시에 별미를 더한다. 스크래치 워크숍이란, 미국의 엠아이티 미디어랩(MIT media lab)이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어린이들이 직접 이야기를 꾸미거나 만화, 게임을 창작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이는 이미 여러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작가는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러한 전시가 특별한 게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그림자가 따라와요>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을 최대한으로 배려한 전시다. 지루한 여름 방학, 학원을 오가느라 지쳐있거나 게임에 빠져 컴퓨터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친절한’ 가상 세계 속으로 빠져보는 것도 좋게다. 시각의 한계에서 벗어나 쉬고 있던 오감과 온몸을 활용해보자.


Info 2008.7.4 금 ~ 2008.8.24 일, 고양 어울림누리 어울림미술관, 성인 5,000원, 학생 (초, 중, 고) 4,000원,  7세 이하 아동 3,000원, 월요일 휴관, www.artgy.or.kr

Tip 전시회 오픈은 오전 10시이며 오후 8시면 문을 닫는다. 관람은 약 40~50분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고양시가 멀게 느껴진다면 일찌감치 출발할 것.

월간 Spa Life 8월호용 원고 풀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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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캣츠비'와 '선'의 호시절 (=사진 제공:다온커뮤니케이션)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연애 스토리,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세상은 멀티태스커를 원한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넘어서, 사랑도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잘 하는 연애는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못하는 연애는 능멸과 모욕을 받는다. 세상은 잔혹하고 연애는 지옥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곤 한다. 이렇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수만 가지 감정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 <위대한 캣츠비>를 소개한다.

미국 작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 같은 강도하 원작의 본 작품은, 지난 2005년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가 시작된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웹툰이다. 웹이라는 한정된 공간적 제약을 깨고 영상미 넘치는 표현으로 찬사를 받은 이는 그해 대한민국 만화대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드라마, 뮤지컬, 갈라 콘서트 등으로 제작되며 꾸준한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뮤지컬로서는 어느덧 시즌3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 <위대한 캣츠비>. 이 작품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라는 보편적인 정서

아담과 이브가 저주를 받고도 서로를 사랑했듯, 연애는 인간사 최대의 화두다. ‘사랑하지 않는 자, 죽어버려라’라는 다소 끔찍한(?) 말이 있듯 표현이 조금 과잉될 경우엔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처럼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말이 무색하게 인물들은 집착과 연정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특정 대상을 갈구한다.

주인공인 만년백수 캣츠비와 페르수는 대학시절부터 6년간 연인 관계였으나 페르수가 재혼남과 결혼하면서 이별을 맞이한다. 캣츠비의 룸메이트이자 동기인 하운두는 과외선생을 시작한 뒤 학부형인 몽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캣츠비에 다가온 여자 선은 그에게 순수한 감정을 쏟는데 여념이 없다. 올바른 사랑이든 비뚤어진 사랑이든 인물들은 모두가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극중 주요 캐릭터들의 나이는 26세로 설정되어있다. 의욕이 앞서는 열정에서 벗어나 결혼을 생각할 시기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덜 익었다. 표현 방식에서는 열여섯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에 극은 덜 자란 만큼 충돌이 많은 20대의 사랑만을 다루지 않는다. 조연들의 나이를 보자. 몽부인은 30대, 페르수의 남편 부르독은 40대, 몽영감은 50대다. 이러한 나이 설정에서 20대의 사랑과는 다른,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인물들의 사랑 방식이 드러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조연들의 사랑방식은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몽부인은 육감적이고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지만 원작의 몽부인은 인자하고 안정된, 오히려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또한 전자의 몽영감은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만화적인 캐릭터이나, 원작에서의 그는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중년 남성으로 그려진다. 둘은 원작에서 뮤지컬로 가는 과정에서 성격의 표현됨이 가장 많이 달라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만국의 공통 언어다. <위대한 캣츠비>는 사랑의 깊숙한 지점에 이른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0대의 철부지들의 사랑,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자극이 필요한 30대 주부의 사랑, 곁에 있는 이에게 집착을 보이는 40대 재혼남의 사랑, 상대에게 관대해지는 50대의 사랑까지, 극은 겹쳐진 셀로판지 같은 여러 톤의 목소리로 각자의 사랑 방식을 이야기한다. 연령이든 방법이든 어떠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지독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다.


이런 일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있을 법한

눈여겨 볼 것이 또 하나 있다. 이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들의 배치에 대한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약한 캣츠비는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을 닮았고, 캣츠비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선은 춘향이다. 반면에 사랑은 종교라며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하운두는 일편단심형 카사노바며, 남편 부르독과의 관계에서 도피하며 캣츠비에게 ‘나도 동시에 사랑해줘’라고 당당하면서도 처절한 대사를 내뱉는 페르수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관념을 철저히 무시하는 반(反) 테스적 성향을 보여준다. 이렇게 <위대한 캣츠비>는 과거형의 캐릭터를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의 애정 관계에 녹아냈다는 점에서 온고지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 캐릭터들은 고전의 단순한 답습에 그치지 않고, 상황이나 반전 속에서 변모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가령 선이 캣츠비를 향해 모성애적인 사랑을 보인다든지, 하운두의 사랑의 비밀이 밝혀진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위대한 캣츠비>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극이다. 삼각, 사각으로 얽힌 관계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충분한 가십거리가 될 만큼 복잡하다. 하지만 자칫 중구난방으로 그려질 수도 있는 관계망을 원작에서는 섬세한 감정 터치로, 뮤지컬에서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영상의 문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특히 인물들이 핀 조명 아래에서 펼치는 합창 신과 모노드라마처럼 비운에 젖어 부르는 노래들은 가요처럼 쉽게 귀에 붙는다. 또한 익숙한 일러스트들이 컴퓨터 그래픽 효과로 처리되는 것은 시각적 효과를 더함과 동시에 원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의 프로방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자신의 빈자리가 허전해서 누군가를 찾는 건 사랑의 초기에 경험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자신의 공란은 자기 자신만이 채울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빠지고 알면서도 다치고 알면서도 갈구한다. 이렇듯 사랑은 공포영화이자 롤러코스터다. 공포를 예견하면서도 도전하게 되는 모험이다. 하지만 사랑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다. 이는 절벽 사이에 걸쳐진 다리처럼 불안하게 삐걱거리다가도, 솜이불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혹자는 사랑도 상품이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해봤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굳게 믿는다. 이렇듯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법의 묘약, 익숙한 듯 낯설게 뒤엉킨 백가지 사랑의 맛을 <위대한 캣츠비>에서 느껴보자. 극 중 캣츠비와 선이 상상하는 ‘프로방스’가 프랑스의 진짜 프로방스든, 재개발 지구에 세워진 아파트의 외래식 이름이든 영영 그 곳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건 과정 자체가 목적이라지 않나.

월간 스파 라이프 8월호 원고 풀버전
* 본지 버전과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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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놈’은 다 나온다

 

거부할 수 없는 세 놈의 매력,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흥부전>의 흥부와 놀부,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 요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전자는 ‘착한 사람’이고, 후자는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좋고 나쁨의 경계가 뚜렷한 극이 있는 반면, 착한 놈과 나쁜 놈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도 있다. 과거의 문법이 전자라면, 현재의 경향은 후자다. 최근 극에서 과거와 같이 권선징악이 뚜렷한 인물 구도를 찾아보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여기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그대로 반영한 듯 인물들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상당히 유려하게 그려낸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이미 ‘2008년 한국 영화 최고의 작품’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뜨거운 이슈를 뿜어온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그것이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영화의 참맛은 액션 신에서 나타나는 스케일과 국가와 장소를 넘나드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캐릭터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물 설정에 있다. 스포일러가 다분하므로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살짝 페이지를 넘기시길.


열길 물속은 알아도 이 놈 속은 모른다, ‘좋은 놈’ 도원

정우성이 연기한 ‘좋은 놈’ 박도원은 외형적인 면만 보자면 전형적인 서부 영화 캐릭터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미끈한 말을 타고 만주를 질주하는 그. 피가 낭자하는 결투를 벌여도 얼굴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는 얄미움이 <반지의 제왕>의 앨프족 올랜도 블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도원은 정의가 최고라며 엄지를 세우는 히어로는 아니다.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에 속지 말자. 영화를 보며 쉽게 간과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는 멋진 외모의 총잡이이기 이전에 ‘사냥꾼’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 명의 캐릭터 중 가장 의뭉스러운 놈이다. 말 없는 놈의 공통점 첫 번째, 일단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태구(송강호 분)가 보물 지도를 찾은 뒤의 미래에 대한 장광설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 그는 어딘가를 멍하게 응시하며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한다. 두 번째, 모든 행동을 애매하게 한다. 극의 초반에서 현상수배중인 태구가 온 몸을 들이밀며 총질을 할 때,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태구의 곁을 스쳐간다. 또한 보물 장소를 발견하고도 직접 삽질 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 항상 제3자가 되고자 하는 그. 우물가에 가더라도 함부로 물을 떠먹지 않는 그의 태도는 신중함을 넘어서, 의심이 많아 치밀해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귀신도 알기 어려운 속을 가진 도원. 그는 100%를 다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만 보여준다. 예사롭지 않게 빛나는 눈빛 속에는 대체 무엇이 숨겨진 것일까. 그가 태구나 창이(이병헌 분)에 비해 약간 비중이 적게 그려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분명한 건 도원은 이 영화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알 수 없는 놈’이라는 거다. 


잔인함을 넘어선 섬뜩한 눈빛, ‘나쁜 놈’ 창이

‘나쁜 놈’ 이병헌의 악당 연기가 돋보이는 창이는 세 캐릭터 중 가장 만화적인 인물이다. 동물의 털을 연상시키는 울프 컷에 스모키 메이크업, 흑백으로 일관된 패션은 영락없는 악마 캐릭터다. 희번덕거리는 눈빛 속에는 상대를 숨통을 끊는 것 자체가 목적인 동물적 본능이 꿈틀댄다. 그러나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불편 하게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무자비하게 처치해버리는 창이에게는 숨겨진 트라우마가 있다.

흔히 악한 캐릭터는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뒤늦게 후회하거나 반성하기도 하지만 창이의 경우는 다르다. 순도 100%의 마성을 여과 없이 발휘하는 그에게 일말의 반성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싶더라도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나 <아이덴티티>의 존 쿠삭처럼 자신의 다중적인 면으로 인해 고뇌하지 않는다. 창이는 뼈 속까지 까만 놈이다. 너무 까만 나머지 ‘뻔뻔한 놈’이다.

그의 모토는 ‘승리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이다. 매번 승리하면서도 빼앗길까봐 경쟁자(태구, 도원)를 물리치려 하는 그에게 그나마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는 장면을 찾자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세 놈이 대치하는 막판의 장면이다. 이 신에서 냉혹함, 잔인함, 처절함, 비열함 등 세상만사의 감정을 그려내는 표정 속에는 과거도 미래도 소용이 없음을, 오직 자신에겐 피로 얼룩진 현재만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으려하는 창이는 욕망을 과도하게 쫓다가 결국 그 욕망으로 인해 무너지는 한 인간이다. 물론 무너지면서도 뻔뻔해서 문제지만, 그것이 철저한 악당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인간 본성의 비뚤어진 욕망이 빚어낸 메타포 자체다.


말썽쟁이 코믹캐릭터, 과연 그게 다일까? ‘이상한 놈’ 태구

넘어지고 살갗이 찢겨나가도 온몸으로 부딪히는 무대포 액션 맨. 송강호가 연기하는 윤태구의 몸짓에는 성룡으로 대변되는 중국계 액션 영화의 정신없는 동작과 슬랩스틱코미디의 소란스러움이 담겨있다. 그가 <붉은 돼지>의 포르코 롯소가 쓰고 나오는 파일럿 고글을 쓰고 오토바이를 탄 채 만주 벌판을 질주하는 광경은 어떻게 보면 참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1930년의 만주는 실로 다국적 인종들이 들끓던 무법천지였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모습은 역사의 진짜 일면이다.

밟히면 밟힐수록 두꺼워지는 배짱을 지닌 칠전팔기형 인간 태구. 그는 세 캐릭터 중 가장 한국적인 인물이다. <괴물>에서도 보여줬듯 ‘송강호표 연기’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게 가족이든 돈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국형 가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할머니를 지키고 돈을 사수하는 모습에선 잡초처럼 질긴 생활력이, 또한 뒷일 생각하지 않고 일단 지르고 나서 수습하는 성격은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인의 성급한 일면이 보인다. 하지만 이게 태구가 가진 성격의 전부라면 그는 ‘좋은 놈’이지 ‘이상한 놈’이 아닐 것이다.

소박한(?) 꿈을 안고서 몸부림치는 태구에게 부는 즉 행복이다. 그는 돈이 목적이고, 돈만 있으면 1등자리도 마다한다. 아편굴에 끌려 갈만큼 어수룩하고 특유의 입담과 행동으로 관객을 웃음바다로 밀어 넣는 이상한 놈의 진가는 고글 너머 오토바이 너머에, 그러나 영화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 어떻게 보면 진짜 무서운 놈은 창이가 아니라 태구 일지도 모른다.


서부 영화, 홍콩형 느와르의 오마주가 구석구석 보이는 <놈놈놈>의 질주. 외신은 스파게티와 마카로니를 비웃는 김치 웨스턴이라며 영화를 극찬했다. 감독은 액션 영화라는 틀 속에서 단순하게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과 사건의 단서들을 영화 곳곳에 밀도 있게 배치하는데 성공했다.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대륙을 둘러싼 역사의 현장에 서부 영화의 코드를 차용한 영화는 그 어디에도 없는 21세기형 사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대자연 만주의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세 남자의 버라이어티 액션 대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딱 한 놈만 살아남든 세 놈 다 죽든, 이 영화에 나올 놈은 다 나왔다. 이제 당신이 영화의 네 번째 놈이 될 차례다.

월간 Spa Life 8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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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 맥심 코리아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JY6UylCPFB8)


젊고 예쁘며 글래머러스한 몸매의 여성이 DJ 부스 위에 선다. 어디를 봐도 눈에 띄는 외모와 몸매다. 그런데 보통 디제이들과는 조금 다른 행동을 한단다. DJ 덱 앞에서 뜬금없이 한 바퀴 돌고, 자신이 만들었다는 춤을 춘단다. ‘피리춤’이라나, 아무튼 그녀의 시그니처 댄스라고 한다. 그녀의 영상에는 많은 악성 댓글이 달린다. 그녀를 욕하는 사람도 매우 많다.  DJ라면 무엇보다 음악에 집중을 해야 하거늘, 그녀의 부족한 음악성이 문제라고 한다. 사람들을 춤 추게 만들라고 했더니 자기가 춤을 춘단다. 뭔가 한다고는 하는데 쓰레기같고 허접스럽단다. 그것이 사람들이 소다를 욕하는 주된 이유다.


여성 혐오의 극단이 창녀 혐오라면, (창녀 혐오는 남성(주체)-여성(객체)으로 나뉘는 젠더 이분법에서 남성 주체의 성적 욕구 해결 ‘도구’로서, 여성 객체의 주체성이 완전히 상실됐을 때 성립한다. 창녀는 남성의 권력욕과 지배의식에 완전히 굴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DJ 소다는 창녀 혐오의 기믹(gimmick ; 술책)을 전면적으로 사용한다. 음악보다는 비주얼의 섹슈얼함에 집중하며 (그녀를 싫어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노출이 심한 옷을 즐긴다 (그녀의 취향이자 콘셉트인 것 같다). PC 화면 속에서나 존재할 것 같은 비주얼로, 남성 판타지가 내면화된 섹스 어필을 꾀한다. 소다는 남자들이 좋아하는 것을 너무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이 자신을 과하게 좋아하거나, 과하게 싫어하게 만든다. 혹은 좋아도 싫어하는 행동을 취하게끔 한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자극적이다.


DJ 소다에 대해 일률적이고 극단적인 욕설이 쏟아지는 현상, 나는 이것을 ‘소다 혐오’라고 부르고 싶다. 그녀의 육감적인 몸매와 미모에 드러난 극단의 여성성에는 열광하면서, 동시에 디제이로서의 실력이 부족하고 미숙해 보이는 행동 패턴에 대해서는 입에 불붙은 듯 화를 내는 사람들의 이중적 반응 때문이다. 주로 실력이, 때로는 외모가 욕을 먹는다. 대체로 둘 다 욕을 먹는다. 그녀는 존재 자체로 욕을 먹는다. 그리고 그런 부정적 발언들의 발화자 다수가 남성이라는 점은 매우 흥미로운 사실이다.


나는 그녀를 혐오하는 다수 남성들의 반응에서, 우습게도 마누라와 여자친구 몰래 유흥업소에 다니는 동시에 ‘성 노동자 여성’이 팁을 달라는 요구에는 거칠게 불응하는 성인 남성들의 이중적 모습이 연상되었다. 음악도 못하는 저런 야하고 천박한 여자 디제이’년’은 관객을 신나게 해주는 것에나 집중하면 될 것을, 혹은 ‘업소’에서 가만히 내가 명령하는 대로만 순응하면 될 것을, 그녀는 굳이 ‘주체적으로’ 커다란 가슴을 흔들어대며 무대의 질을 떨어뜨린다. 한 마디로 예상치 못 한 행동으로 오빠들을 불쾌하게 만든다. 


정말로 그녀가 도덕의 절대 가치에 어긋나거나 법에 저촉되는 죄를 지었다면 사회에서 ‘매장’당하거나 활동을 하지 못하는 게 수순일 텐데 왠걸, 그녀의 몸값은 줄곧 상승하고 있는 모양이다. 근래는 동남아 클럽 시장에 진출했단다. 유명 포털 사이트가 만든 VOD 어플리케이션의 실시간 방송에도 출연했단다. 현실이 그렇다면 그녀에 대한 공연/행사 산업의 수요가 분명히 존재한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녀를 매장시키고 싶은 사람들의 분노가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설마 겉으로는 무지막지한 욕설을 퍼부으면서 뒤에서 은밀히 그녀의 영상을 챙겨보고 있는 것일까. 그렇게 그녀를 죽일 듯이 욕을 하던 사람들이?


이쯤 되면 그녀를 욕 하는 동시에 영상을 찾아보는 이들의 속내가 궁금해진다. 굳이 추측하자면, 막장 드라마를 보는 심리와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드라마 전개의 극적 구조와 부족한 당위성에 쉽게 납득하지 못하면서도, 단발적인 재미와 말초적 흥미 때문에 그것을 본다. 욕을 하면서도 계속 본다. 뒤가 궁금하기 때문이다. 표독스러운 드라마 속 ‘악녀’는 종종 액받이 무녀가 된다. 그리고 그녀를 향한 욕은 어떤 형태든 쉽게 용인된다. 가상 세계라는 안전한 보호막 속의 절대 악이기 때문이다. 대상을 정해서 때리는 것은 부담이 없고 대체로 재미있으며 중독성을 지닌다. 그것이 폭력의 중독성이다. 만약 대상이 악을 자처할 경우, 즉 욕먹을 짓을 할 경우 욕의 정당성은 쉽게 확보된다. ‘한 놈만 팬다’는 말은 대상에 대한 ‘나’의 절대 권력을 뒷받침한다. 


오히려 소다의 행보와 의도는 TV 드라마처럼 쉽게 읽히는데, 그녀의 ‘죄질의 막중함’을 논하는 남자들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디제이는 자고로 음악적 감수성도 뛰어나고, 뭔가 있어 보이는 ‘형님’이 해야 하는데, 왠 ‘어린’ ‘한국’ ‘여자애’가 디제잉 하랬더니 춤이나 추고 되도 않는 백 스핀이나 하며 돈 벌어먹는 게 오빠들은 괘씸한 것일까. 만약 소다를 향한 일관적인 남성들의 분노가 우리 공연 문화의 퀄리티 상승을 꾀하고자 하는 집단적인 사명감의 발로라면, 그래서 마구 ‘나대는’ 소다에게 오빠들이 진중한 마음으로 따끔한 꿀밤을 한 대 때리고 싶은 거라면, 그네들의 공연 문화에 대한 투철하고 자발적인 애정 정신을 독려하며 문화관광부에서 표창장이라도 내려줘야 하는 것 아닐까.


그녀는 어쩌면 본의 아니게 젠더 전복의 아이콘이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극단적으로 표현된 통념적 여성성에 대한 남성들의 이중심리를 이용한 노이즈 마케팅은 의도적이든, 의도치 않았든 성공적이다. 특정 대상에 대한 극렬한 혐오는 극단적 애정의 뒤틀린 증상일 때가 많다. 소다는 네가티브하고 말초적인 반응을 보이는, 그녀가 절대 악으로 취급되길 원하는 남성들의 집단 심리적 역풍으로 톡톡한 금전적 수혜를 얻었다. 이 글을 쓴 뒤 DJ 소다의 리믹스 트랙을 들어보려 한다. 그녀는 나이키 조던 마니아라고 한다.





내가 알기로 정이현이란 작가는 신경숙만큼(?)이나 유명하고+독자의 호불호가 뚜렷한 작가다. 사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회사 앞의 퀴퀴한 도서관에서 조우한 <달콤한 나의 도시>와의 만남은 반갑고도 알쏭달쏭했다. 작품을 읽기 전, 드라마는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등장인물의 외모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상상보다는 대입에 더 가까웠지만) 자꾸 지난 기억이 캐릭터에 대한 상상을 방해하는 바람에 슬며시 짜증이 샘솟기도 했다. 이래서 극을 본 후 원작은 읽는 것은 좋기도 싫기도 하다.

작가들이 자주 부정하는 게 있다면 등장인물과 원작자를 동일시 하는 관점일 터다. 하지만 정이현이라는 작가는 쿨하게도 작가보다는 오은수가 먼저 읽히고,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와, '쿨내난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혹여나 작가 후기가 단행본 출간 직전에 쓰여진 거라면 소설의 반응을 다이렉트로 얻으면서 이미 '넌더리'가 날대로 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이 소설은 J모 일보에 장기연재되었다.) 오은수의 뒤에 서고 싶던 작가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정이현은 초월적 소설쓰기에 통달한 대인배이거나, 사람에 질린 30대 여성이거나 둘 다 일 것 같다. 

30대가 되어도 지속되는 노골적 방황이 20대인 나의 살갗에 와닿는 기분은 짜릿하고도 홧홧했다. 이것이 20대를 위한 소설이라면 주인공 은수는 태오와 영수 사이에서 밀고 당기기를 하며 자존감 상승을 맛보았을 테지만 소설을 달랐다. 결말에서 묵묵히 홀로 떡볶이를 먹고 카페모카를 사먹는 은수의 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당연하게 느껴졌달까. 사회초년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랜 직장 생활을 해온 올드미스에 대한 경외심이 솟았달까. 아직 가지 않은 길을 다녀온 뒤 숨을 돌리는 그녀들을 보는 나의 눈은, 여권없는 고등학생이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촌 언니를 부러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죽도록 누군가에게 사랑받지도 않고,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는 그녀들은 올 겨울도 알파카 코트를 입고 MCM 가방을 든 채 충혈된 눈으로 도시형 고속버스를 탈 것이다. 뿌연 성에가 낀 종로의 밤거리. 입김을 불고 불어도 자꾸 뿌옇게 김이 차고 마는 기나긴 겨울. 그녀들의 30대란 교복쟁이들처럼 성에낀 버스 창문에 낙서를 하기 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나이인걸까. 여자의 30대란 꽃이 만개한 시기일까, 아직 개화기인지 장담할 수 없는 나이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자 문득 얼굴이 홧홧해지면서 멀지 않은 나의 30대가 슬금슬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들에 덤덤해지기엔 아직은 어설픈 20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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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 본문 중에서

  정한아의 글은 밝고 명랑하다.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무엇보다 젊다. 등단작 '나를 위해 웃다'때부터 그녀의 젊음은 항상 정직했다. 방황은 하되 비겁하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공중에 붕붕뜨기도 하고 리드미컬하게 춤도 추었다. 그렇게 성장한 서사는 결국 복숭아씨처럼 알차고 단단한 진실과 마주했다. 참, 다행이었다.

  이렇듯 건강하고 강인한 그녀의 글도 과거에는 치기어린 방황의 시절을 겪었을 테다. 그러한 것들에서 한 발짝 물러선 글 속에 사람의 향기가 앞선다. 무지와 무관심, 혹은 자의식 과잉과 지적 허영심 속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오늘날의 20대를 위한 지침이 정직하고 꼼꼼한 문장 속에 한 땀 한 땀 녹아있다. 이런 소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머릿 속이 온통 세상에 대한 설익은 분노로 점철되었던 그 때

내 나이 또래 여자들의 라이프 스타일과 점점 동떨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들던 요즘이었다. 가방에는 아이팟 터치 2세대나 아이스크림 폰을 담고, 한 손으론 유니클로(Uniqro)나 아메리칸 어패럴(American Apparel)의 쇼핑백을 메고서 남자친구와 신사동의 '핫 스폿'이라는 곳에서 터무니없이 비싼 커피나 맥주를 마시고 헤어지는 식의, 루트가 뻔한 데이트 코스들. (숨이 차다) 그 속에서 '저런게 다 무슨 소용이야?'라며 '무심한듯 시크한척'하고 싶었던 나는 '읽어야지'라고 생각만 했던 김사과의 장편소설 <미나>와 만났다. 아니, 재회했다.

학교를 다닐 때 '이 책이 아니면 글쓰는 사람이 아니죠'라는 말에 냉큼 3년치를 신청했던 한 문예 계간지 속에서 김사과라는 작가를 만났을 때. 그녀는 나로 하여금 대학교 3학년이라는 신분으로 데뷔한 소설가 한유주와 더불어 '그야말로 엄친딸이구나'라는 느낌을 매우 강하게 주는 작가였다. 짧게 인터뷰한 기사만 봐도 그녀는 외고를 자퇴하고서 검정고시를 통해 천재 아니면 또라이만 모인다는 한예종에 간 데다가 '영이'라는 파괴적인 소설로 창비신인소설상을 수상한, 어마어마하게 길고 화려한 수식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데뷔작 <영이>를 만났을 때도 나는 쉽게 소설의 호불호를 정할 수 없었다. 그녀의 등장은 한 마디로 '교란'이었다. 

소설 속에는 소위 엄친딸이라 불리는 여고생 '미나'와 그녀만큼 표면적으로는 잘난 여고생이나 미나로 인해 태생적으로 열등감을 느끼는 '수정'이란 두 인물이 등장한다. 친구의 자살에 학교를 자퇴하고 대안학교를 다니게 된 미나와 그녀의 절친한 친구이자 한창 사춘기인 수정의 관계 또한, 소설 전체의 명징하지 않은 메세지만큼이나 묘하다. 애증을 넘어서, 질투를 넘어서, 설익은 분노를 넘어서 마치 휴화산이 폭발하듯 마무리되는 결론에 이르기까지의 농밀한 내러티브는 책장을 덮는 순간 독자로 하여금 개운함보다는 공포를 느끼게 한다.

우리에게 교복을 입던 시절의 기억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추억이다. 나부터가 몇 년 전에는 소설 속의 소녀들처럼 길거리에서 파는 스타킹마냥 흔하게 널린 여고생떼 중 하나였기 때문일까. 고3 당시, 수능을 보고나서 한 학교는 보기좋게 떨어지고, 20점 하향한 학교도 어이없게 떨어지고, 희망을 갖고 있던 마지막 학교에서 예비번호 한 자리 수를 받는 3연패를 경험한 나. 나 또한 제도의 무수한 피해자 중 하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 때의 '3연패'는 나라는 인간의 20대 초반을 지배하는 피해망상을 고밀도로 증폭시키는 사건의 발단이었던 듯 하다. 재수를 하라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흘려들은 채 (당시 나는 무엇보다도 수험생이란 끔찍한 직업을 다시는 갖고 싶지 않았으며, 집안 형편 또한 재수를 할 처지가 못되었다) 단지 전공만 보고서 이름 없는 전문 대학의 추가 모집 원서를 집어넣었다. 학교 생활은 밋밋하단 것 빼고는 그닥 나쁘지 않았다. 나름대로 칭찬도 받고 상도 타며 잘 다녔다. 물론 남들처럼 적당 농도 이상의 재미가 가미된 대학 생활은 즐길 수 없었지만 말이다. (MT도 한 번도 가지 않았고 동아리 활동도 하지 않았으며 남자친구도 사귀지 않았다. 학비를 벌기 위해 했던 지독한 아르바이트에서 벗어나 도서관에 가거나 음악을 들으며 서울의 이 곳 저 곳을 홀로 탐방하고 다니는 게 당시 나의 가장 큰 낙이었다. 용기를 내서 음악 동호회로 몇몇의 친구들을 알게 되었고 시를 쓰게 되었고 소설을 가끔씩이라도 찾아읽었던 게 그나마 그 때 잘한 거라면 잘한 일일까. 아무튼 '대학생의 특혜'라는 것을 여유롭게 누리기에, 내 캠퍼스 라이프는 너무 춥고 어두웠으며 가난했다.)

그렇게 내 10대와 20대의 길목은 피해 망상만 가득한, 세상에 대한 설익은 분노로 가득찬 시절이었다. 그 피해의식은 지금도 미처 씻어내지못한 라면 찌꺼기처럼 남아있다. 하지만 시간이 약이라고 했나. 나아진 것은 없지만 그것들은 모두 지나갔다는 것 하나만으로 나에게 큰 안도감을 주고 있다. 미나와 수정을 모습을 보면서 나는 지리멸렬한 과거와 작별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어쩌면 적지 않게 위안을 받았는지도 모른다.

수능 시험을 보기 전날, 나는 새벽 2시까지 끙끙거리며 울었다. 요즘도 자주 고등학생이 되거나, 수능 시험장에서 시험지를 푸는 꿈을 꾸는 나에겐 씻을 수 없는 그 때 이후의 기억이 트라우마처럼 지속되고 있다. 그 사이 나는 10대 시절보다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양한 일을 겪고 실패도 하고 상처도 받았다. (물론 아직 갈 길이 멀지만) 내가 밟고 지나온 돌들이 모두 디딤돌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는 것부터가 내가 이제 어느 정도는 철이 들었다는 의미였으면 좋겠는데, 여전히 나에겐 철이 든다는 것에 대한 명백한 기준이 없다. 예전과 별로 달라진게 없는 2008년의 나는 그저 <미나>의 책장을 덮으며 회색 시험지처럼 쓸쓸했던 모노톤의 추억들을 상기할 뿐이다. 지금도 인공 닭장에서는 수많은 무정란들이 태어난다. 힘없고 보잘 것 없는 알들의 숨구멍은 외부의 힘에 의해 철저히 막혀있다.

하이퍼리얼리티를 표방한듯한 서사와 지적 사고가 거세된 듯한 소녀들의 구어체가 짬뽕되어 낯설은 이야기로 탄생한 <미나>. 책 속에서의 미나와 수정은 노스페이스 바람막이 잠바와 아디다스 가방처럼 유행조차 재단된 시대를 살아가는 소년소녀를 표방한다. 80년대에 태어난 독자들이 두 소녀들을 통해 학창 시절을 회상하는 일이 결코 낯설지 않듯, 미나가 수정을 칼로 난자하는 장면은 다소 충격적이지만 소설의 전체 흐름을 따져본다면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비상식이 상식보다 더 상식적인 것으로 통하는 세상 아니던가. 미나와 수정이 당한 세상의 폭리에 비하면 수정의 손을 거친 미나의 죽음은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제도의 시스템 내에서 영리하게 적응하나, 끝까지 지독한 기계로 남았던 미나가 천진할 정도로 그것에 대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하는 모습에서, 작가는 수정의 칼자루를 통해 세상을 조소하는 것이다. 이는 어른들이 '철없는 고딩들의 치기와 피해의식 과잉'이라고 치부하고 싶어하는, 더럽고 추잡한 세상의 단면 자체를 보여준다.

작가의 문체는 충분히 쿨하지만 쿨한 데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단어를 가지고 노는 장난만 배운 일부 풋내기 작가들과 차별성을 가진다. 그녀는 찌고 쪄서 충분히 익혀낸 문장으로 세상의 목을 영리하지만 안전하게 비튼다. 사색이 사치가 되고 맹목적인 소비가 시대정신이 되어가는 현재, 폐부를 찌르는 그녀의 이야기들은 파괴적이고도 젠틀하다. 소설은 독자에게 독자가 느껴야하는, 혹은 해야 하는 일은 미나와 수정의 처지를 안타까워하고 위로해주는 게 아니라고 말한다. 어쩌면 이토록 충격적인 엔딩은 독자가 감상평을 남길 틈마저 일찌감치 거세해버리려는 의도일지도 모른다. 해피엔딩을 바라는 이들에겐 참 안타까운 일이지만 <미나>의 결론엔 일말의 동정심도 찾을 수 없다. 그렇다. 이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고 쓸쓸한 청소년들의 이야기다. 
 

GOOD

1. 지금-오늘을 살아가는 소녀들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작가의 영상미 넘치는 필력.

2. 세상의 구조에 대해 비판하는 수정의 심정에 대한 파워풀한 서사.

BAD

1. 수정과 친구-연인 사이의 관계이자 미나의 친오빠인 민호에겐 뚜렷한 역할이 없다. 수정이 애증하던 엄친딸을 칼로 죽였다는 걸 이해하고 나면, 자기 친여동생 죽은 걸 보는 10대 소년의 태도는 쉽게 납득이 되지 않는다. 친오빠 맞아?

2. U2나 라디오헤드, 피오나 애플, 뷔욕 등 '지적으로 보이고 싶어하는 형과 누나 스타일'의 음악을 즐겨 듣는 소녀들의 대화 치고는 끝없이 가벼운 '수정'과 '미나'의 수다들. 차라리 빅뱅이나 원더걸스라고 하는게 더 설득력 있지 않을까.

3. 어린 애들이 담배를 너무 자주 태우는구나. 어차피 속담배는 아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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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플리커. 상기 이미지는 내용과 무관합니다)

흔히 전시라고 하면 단순히 그림을 보거나, 조각품을 보는 것에 한정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최근 전시의 경향은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해졌다. 눈을 감는 것을 넘어서 코로 냄새를 맡고 손으로 꾹꾹 눌러보는 것도 가능해졌다. 여기 여름 방학을 맞이해 온 가족이 참여할 수 있는 두 가지 전시가 있다. 단순히 보는 것을 넘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참여형 전시를 소개한다.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신촌 아트레온 <어둠 속의 대화>전


하루하루 생활을 견뎌내기에 바쁜 현대인들이 완전한 어둠 속에 빠져본 경험이라고는 잠자리에 누울 때 뿐 일 것이다. 그러나 정신이 깬 상태로 자신의 손마저 보이지 않는 완전한 어둠 속에 빠져본 경험을 해 본 이는 얼마 없을 터다. 거리의 네온사인, 자동차 불빛, 텔레비전 브라운관 속의 현란한 화면까지 세상에는 우리의 눈을 쉬게 하는 것보다 지치게 하는 것들이 더 많기 때문이다.
여기 더운 날씨 탓에 일상의 사소한 불쾌감마저 컨트롤이 되지 않는 현대인들에게 잃어버린 자신의 내면을 차분하게 발견할 수 있게 해주는 전시가 있어 화제다. 흔히 ‘전시회’라고 하면 화려한 그림과 멋들어진 조각품을 떠올리기 마련이지만, 이곳에서는 애초에 그런 것을 기대하지 말자. 이곳에서 눈으로 볼 수 있는 거라곤 오로지 ‘완전한 어둠’ 뿐이다.

<어둠 속의 대화>는 기획자와 참여자의 경계를 허문 참여형 전시로 21년째 계속되는 중이다. 1988년 사고로 시력을 잃고도 현실에 안주하는 것을 거부했던 저널리스트에게 감동 받은 독일의 박사 안드레아스 하이네케에 의해 창시된 이후 전 세계 130개 전시장에서 세계인을 감동시켰다. 현재까지도 8개의 상설 전시장이 운영되고 있을 정도로 각국의 꾸준한 호응을 얻어 왔다. 국내의 인기도 계속 되어서 2007년부터 서울 예술의 전당에서 시작한 결과, 최근 신촌 아트레온에서 3차 전시가 열리기에 이르렀다.

오직 캄캄한 어둠뿐인 이 전시의 관람객 중 98.9%가 ‘내 생의 최고의 경험’이었다고 극찬했다고 한다. 게다가 전체 관람객 중 절반 이상이 1번 이상 관람한 사람이라고 하니 대체 ‘완전한 어둠’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것이 인간에게 대체 얼마나 큰 자극을 안겨주는지 건지 ‘안 봐도 비디오’다.

전시를 관람하는 약 60분의 시간동안 관람객에게 앞을 볼 수 있는 권리는 완전히 배제된다. 이에 참가자들은 오직 안내자의 목소리에 의지한 채 지팡이 하나를 짚고 나아간다. 시각을 제외한 나머지 감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셈. 어떤 연인들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꼬마는 앞이 안 보인다며 엄마부터 찾는 등 갑작스러운 어둠에 처음에는 불안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이들은 인간의 오감(五感) 중 커다란 한 감각이 차단됨으로 인해 나머지 죽어있던 감각을 사용하는 법을 깨우치게 된다. 이는 마치 한 소년이 오감 외의 숨겨진 감각을 찾아내는 과정을 그린 영화 <식스 센스>를 연상시킨다. <어둠 속의 대화>는 진화하는 전시다. 오감 뿐 만 아니라 공기, 압력, 온도를 느낄 수 있도록 다채로워졌다. 세계 각국의 사랑을 쑥쑥 먹고 자란 결과 550만 명의 관객을 울렸고, 이제 한국에서 더 많은 이들의 가슴에 펌프질을 할 예정이다. 영화 한 편을 보고 난 후의 감동, 좋은 책 한 권이 주는 여운 그 이상의 후폭풍이 여기 서 불고 있다. 조심스럽게, 그러나 과감하게 발을 옮겨보자. 당신의 마음 깊숙한 곳에 숨겨진 어둠의 문턱을 향해.
 

Info 2008.6.20 금~ 2009.2.22 일, 신촌 아트레온 13층 전시실, 예약 시 성인, 청소년 20,000원, www.dialogue-in-dark.com

Tip 관람을 원한다면 티켓링크에서 온라인 예약 신청을 해야 한다. 또한 사방이 깜깜한 탓에 전시관람 전 간단한 오리엔테이션이 이뤄진다. 반드시 예약 시간 15분 전에 체크인할 것.


휴대폰으로 배우는 현대 미술

어울림 미디어아트 체험 전 - 그림자가 따라와요


요즘 아이들에게 컴퓨터는 필수, 휴대폰은 기본, 게임기는 옵션이다. 이러한 미디어 기기들의 용이한 접근성에 비해, 이에 대한 사전 교육은 턱없이 부족한 형편이다. 아이들은 미디어가 둘러싼 환경에 아무런 보호막 없이 노출되어있고 때때로 이는 게임 중독, 컴퓨터 중독 등 이른바 ‘미디어 중독’이라는 사회적 징후로 나타난다. 학부모들의 불안이 날로 증폭되어가는 이 시점에서 특효약처럼 등장한 전시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미디어 기기의 순기능을 살려 이에 대한 올바른 이해 뿐 만 아니라 현대 미술에 대한 공부까지 돕는 <어울림 미디어아트 체험전 - 그림자가 따라와요>가 그것이다.
모든 전시물은 미디어 아티스트 최승준의 작품으로, 그는 물리학을 전공하다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입문한 후 예술, 교육, 비즈니스를 종횡무진 하는 전방위 작가다. 집안에서 유치원을 운영해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그의 전시는 ‘쌍방향 소통’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에, 참가자들이 참여할 수 있는 폭이 상당히 넓다. 뭐든지 눌러보고 만져보기 좋아하는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에게 안성맞춤이다.

전시회장으로 들어가면 5개의 방이 있다. 각 방에는 ‘그림자’를 주제로 한 10개의 미디어 작품이 전시되어있다. ‘그림자와의 만남’, ‘그림자와 떠나는 바다여행’, ‘그림자와 함께 숨은 그림 찾기’, ‘소리의 벽과 거인 그림자’, ‘추억이 된 그림자’까지 재치 있는 방들의 이름들이 눈길을 끈다.

첫 번째 방에서는 전시장에 있는 내내 자기 자신을 쫓아다니는 그림자와의 첫 만남이 이뤄진다. 벽면에 설치된 라이트 박스에 자신의 몸을 비추자 내 동작을 똑같이 따라하는 그림자가 생긴다. 두 번째 방에 가자 나의 그림자가 화면 속에 들어가 있다. 그림자는 풀숲 뒤에서 벌레들과 함께 놀거나, 바다 위를 떠다닌다. 세 번째 방에서 특수조명을 받으며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주던 그림자는, 네 번째 방으로 들어가자 키가 5m로 쭉 늘어나 서로서로 메시지를 주고받는다. 마지막으로, 다섯 번째 방에서 관람객은 터치스크린 위에 전시 소감을 남기며 그림자와 기념사진을 촬영한다.

이러한 전시 외에 눈여겨 볼 게 하나있다. 이는 작가가 직접 진행하는 <스크래치 워크숍>으로, 전시에 별미를 더한다. 스크래치 워크숍이란, 미국의 엠아이티 미디어랩(MIT media lab)이 개발한 프로그램으로 어린이들이 직접 이야기를 꾸미거나 만화, 게임을 창작해볼 수 있도록 구성되어있다. 이는 이미 여러 유치원, 초등학교에서 좋은 반응을 얻은 바 있다.

작가는 예술과 과학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이러한 전시가 특별한 게  아니라 즐거운 ‘놀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싶다고 한다. 그의 말처럼 <그림자가 따라와요>는 가족 단위의 관람객을 최대한으로 배려한 전시다. 지루한 여름 방학, 학원을 오가느라 지쳐있거나 게임에 빠져 컴퓨터 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아이의 손을 잡고 ‘친절한’ 가상 세계 속으로 빠져보는 것도 좋게다. 시각의 한계에서 벗어나 쉬고 있던 오감과 온몸을 활용해보자.


Info 2008.7.4 금 ~ 2008.8.24 일, 고양 어울림누리 어울림미술관, 성인 5,000원, 학생 (초, 중, 고) 4,000원,  7세 이하 아동 3,000원, 월요일 휴관, www.artgy.or.kr

Tip 전시회 오픈은 오전 10시이며 오후 8시면 문을 닫는다. 관람은 약 40~50분 정도가 소요되기 때문에 고양시가 멀게 느껴진다면 일찌감치 출발할 것.

월간 Spa Life 8월호용 원고 풀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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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캣츠비'와 '선'의 호시절 (=사진 제공:다온커뮤니케이션)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연애 스토리,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세상은 멀티태스커를 원한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넘어서, 사랑도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잘 하는 연애는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못하는 연애는 능멸과 모욕을 받는다. 세상은 잔혹하고 연애는 지옥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곤 한다. 이렇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수만 가지 감정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 <위대한 캣츠비>를 소개한다.

미국 작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 같은 강도하 원작의 본 작품은, 지난 2005년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가 시작된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웹툰이다. 웹이라는 한정된 공간적 제약을 깨고 영상미 넘치는 표현으로 찬사를 받은 이는 그해 대한민국 만화대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드라마, 뮤지컬, 갈라 콘서트 등으로 제작되며 꾸준한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뮤지컬로서는 어느덧 시즌3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 <위대한 캣츠비>. 이 작품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라는 보편적인 정서

아담과 이브가 저주를 받고도 서로를 사랑했듯, 연애는 인간사 최대의 화두다. ‘사랑하지 않는 자, 죽어버려라’라는 다소 끔찍한(?) 말이 있듯 표현이 조금 과잉될 경우엔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처럼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말이 무색하게 인물들은 집착과 연정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특정 대상을 갈구한다.

주인공인 만년백수 캣츠비와 페르수는 대학시절부터 6년간 연인 관계였으나 페르수가 재혼남과 결혼하면서 이별을 맞이한다. 캣츠비의 룸메이트이자 동기인 하운두는 과외선생을 시작한 뒤 학부형인 몽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캣츠비에 다가온 여자 선은 그에게 순수한 감정을 쏟는데 여념이 없다. 올바른 사랑이든 비뚤어진 사랑이든 인물들은 모두가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극중 주요 캐릭터들의 나이는 26세로 설정되어있다. 의욕이 앞서는 열정에서 벗어나 결혼을 생각할 시기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덜 익었다. 표현 방식에서는 열여섯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에 극은 덜 자란 만큼 충돌이 많은 20대의 사랑만을 다루지 않는다. 조연들의 나이를 보자. 몽부인은 30대, 페르수의 남편 부르독은 40대, 몽영감은 50대다. 이러한 나이 설정에서 20대의 사랑과는 다른,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인물들의 사랑 방식이 드러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조연들의 사랑방식은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몽부인은 육감적이고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지만 원작의 몽부인은 인자하고 안정된, 오히려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또한 전자의 몽영감은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만화적인 캐릭터이나, 원작에서의 그는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중년 남성으로 그려진다. 둘은 원작에서 뮤지컬로 가는 과정에서 성격의 표현됨이 가장 많이 달라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만국의 공통 언어다. <위대한 캣츠비>는 사랑의 깊숙한 지점에 이른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0대의 철부지들의 사랑,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자극이 필요한 30대 주부의 사랑, 곁에 있는 이에게 집착을 보이는 40대 재혼남의 사랑, 상대에게 관대해지는 50대의 사랑까지, 극은 겹쳐진 셀로판지 같은 여러 톤의 목소리로 각자의 사랑 방식을 이야기한다. 연령이든 방법이든 어떠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지독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다.


이런 일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있을 법한

눈여겨 볼 것이 또 하나 있다. 이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들의 배치에 대한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약한 캣츠비는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을 닮았고, 캣츠비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선은 춘향이다. 반면에 사랑은 종교라며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하운두는 일편단심형 카사노바며, 남편 부르독과의 관계에서 도피하며 캣츠비에게 ‘나도 동시에 사랑해줘’라고 당당하면서도 처절한 대사를 내뱉는 페르수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관념을 철저히 무시하는 반(反) 테스적 성향을 보여준다. 이렇게 <위대한 캣츠비>는 과거형의 캐릭터를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의 애정 관계에 녹아냈다는 점에서 온고지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 캐릭터들은 고전의 단순한 답습에 그치지 않고, 상황이나 반전 속에서 변모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가령 선이 캣츠비를 향해 모성애적인 사랑을 보인다든지, 하운두의 사랑의 비밀이 밝혀진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위대한 캣츠비>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극이다. 삼각, 사각으로 얽힌 관계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충분한 가십거리가 될 만큼 복잡하다. 하지만 자칫 중구난방으로 그려질 수도 있는 관계망을 원작에서는 섬세한 감정 터치로, 뮤지컬에서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영상의 문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특히 인물들이 핀 조명 아래에서 펼치는 합창 신과 모노드라마처럼 비운에 젖어 부르는 노래들은 가요처럼 쉽게 귀에 붙는다. 또한 익숙한 일러스트들이 컴퓨터 그래픽 효과로 처리되는 것은 시각적 효과를 더함과 동시에 원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의 프로방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자신의 빈자리가 허전해서 누군가를 찾는 건 사랑의 초기에 경험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자신의 공란은 자기 자신만이 채울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빠지고 알면서도 다치고 알면서도 갈구한다. 이렇듯 사랑은 공포영화이자 롤러코스터다. 공포를 예견하면서도 도전하게 되는 모험이다. 하지만 사랑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다. 이는 절벽 사이에 걸쳐진 다리처럼 불안하게 삐걱거리다가도, 솜이불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혹자는 사랑도 상품이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해봤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굳게 믿는다. 이렇듯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법의 묘약, 익숙한 듯 낯설게 뒤엉킨 백가지 사랑의 맛을 <위대한 캣츠비>에서 느껴보자. 극 중 캣츠비와 선이 상상하는 ‘프로방스’가 프랑스의 진짜 프로방스든, 재개발 지구에 세워진 아파트의 외래식 이름이든 영영 그 곳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건 과정 자체가 목적이라지 않나.

월간 스파 라이프 8월호 원고 풀버전
* 본지 버전과 많이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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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올 ‘놈’은 다 나온다

 

거부할 수 없는 세 놈의 매력,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흥부전>의 흥부와 놀부, <매트릭스>의 네오와 스미스 요원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전자는 ‘착한 사람’이고, 후자는 ‘나쁜 놈’이라는 것이다. 이렇듯 좋고 나쁨의 경계가 뚜렷한 극이 있는 반면, 착한 놈과 나쁜 놈의 경계가 모호한 작품도 있다. 과거의 문법이 전자라면, 현재의 경향은 후자다. 최근 극에서 과거와 같이 권선징악이 뚜렷한 인물 구도를 찾아보는 건 꽤나 힘든 일이다. 여기 복잡다단한 세상사를 그대로 반영한 듯 인물들의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을 상당히 유려하게 그려낸 영화 한 편을 소개한다. 이미 ‘2008년 한국 영화 최고의 작품’ 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다니며 가는 곳마다 뜨거운 이슈를 뿜어온 김지운 감독의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이 그것이다. 제목에서도 드러나듯 이 영화의 참맛은 액션 신에서 나타나는 스케일과 국가와 장소를 넘나드는 상상력뿐만 아니라, 캐릭터 내면에서 뿜어져 나오는 인물 설정에 있다. 스포일러가 다분하므로 영화를 보기 전이라면 살짝 페이지를 넘기시길.


열길 물속은 알아도 이 놈 속은 모른다, ‘좋은 놈’ 도원

정우성이 연기한 ‘좋은 놈’ 박도원은 외형적인 면만 보자면 전형적인 서부 영화 캐릭터다. 모자를 푹 눌러쓴 채 미끈한 말을 타고 만주를 질주하는 그. 피가 낭자하는 결투를 벌여도 얼굴에 피한방울 묻히지 않는 얄미움이 <반지의 제왕>의 앨프족 올랜도 블룸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도원은 정의가 최고라며 엄지를 세우는 히어로는 아니다.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에 속지 말자. 영화를 보며 쉽게 간과할 수 있는 한 가지가 있다면 그는 멋진 외모의 총잡이이기 이전에 ‘사냥꾼’이라는 것이다.

그는 세 명의 캐릭터 중 가장 의뭉스러운 놈이다. 말 없는 놈의 공통점 첫 번째, 일단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태구(송강호 분)가 보물 지도를 찾은 뒤의 미래에 대한 장광설을 구구절절 늘어놓을 때 그는 어딘가를 멍하게 응시하며 알 수 없는 혼잣말을 한다. 두 번째, 모든 행동을 애매하게 한다. 극의 초반에서 현상수배중인 태구가 온 몸을 들이밀며 총질을 할 때, 그는 있는 듯 없는 듯 태구의 곁을 스쳐간다. 또한 보물 장소를 발견하고도 직접 삽질 하지 않는다. 모든 일에 항상 제3자가 되고자 하는 그. 우물가에 가더라도 함부로 물을 떠먹지 않는 그의 태도는 신중함을 넘어서, 의심이 많아 치밀해질 수밖에 없는 현대인의 일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귀신도 알기 어려운 속을 가진 도원. 그는 100%를 다 보여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반만 보여준다. 예사롭지 않게 빛나는 눈빛 속에는 대체 무엇이 숨겨진 것일까. 그가 태구나 창이(이병헌 분)에 비해 약간 비중이 적게 그려졌다는 의견도 있지만 분명한 건 도원은 이 영화에서 절대로 빠져서는 안 되는 ‘알 수 없는 놈’이라는 거다. 


잔인함을 넘어선 섬뜩한 눈빛, ‘나쁜 놈’ 창이

‘나쁜 놈’ 이병헌의 악당 연기가 돋보이는 창이는 세 캐릭터 중 가장 만화적인 인물이다. 동물의 털을 연상시키는 울프 컷에 스모키 메이크업, 흑백으로 일관된 패션은 영락없는 악마 캐릭터다. 희번덕거리는 눈빛 속에는 상대를 숨통을 끊는 것 자체가 목적인 동물적 본능이 꿈틀댄다. 그러나 나쁜 놈이 나쁜 짓을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 조금이라도 자신의 심기를 불편 하게 하는 자는 그 자리에서 무자비하게 처치해버리는 창이에게는 숨겨진 트라우마가 있다.

흔히 악한 캐릭터는 자신의 일그러진 욕망을 뒤늦게 후회하거나 반성하기도 하지만 창이의 경우는 다르다. 순도 100%의 마성을 여과 없이 발휘하는 그에게 일말의 반성적인 모습을 발견하고 싶더라도 애초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는 <지킬 박사와 하이드>나 <아이덴티티>의 존 쿠삭처럼 자신의 다중적인 면으로 인해 고뇌하지 않는다. 창이는 뼈 속까지 까만 놈이다. 너무 까만 나머지 ‘뻔뻔한 놈’이다.

그의 모토는 ‘승리 아니면 차라리 죽음을’이다. 매번 승리하면서도 빼앗길까봐 경쟁자(태구, 도원)를 물리치려 하는 그에게 그나마 인간적인 면이 느껴지는 장면을 찾자면,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세 놈이 대치하는 막판의 장면이다. 이 신에서 냉혹함, 잔인함, 처절함, 비열함 등 세상만사의 감정을 그려내는 표정 속에는 과거도 미래도 소용이 없음을, 오직 자신에겐 피로 얼룩진 현재만이 있음을 보여준다. 한 치의 실수도 허용하지 않으려하는 창이는 욕망을 과도하게 쫓다가 결국 그 욕망으로 인해 무너지는 한 인간이다. 물론 무너지면서도 뻔뻔해서 문제지만, 그것이 철저한 악당 캐릭터를 만들어내는 데에 성공했다. 그는 인간 본성의 비뚤어진 욕망이 빚어낸 메타포 자체다.


말썽쟁이 코믹캐릭터, 과연 그게 다일까? ‘이상한 놈’ 태구

넘어지고 살갗이 찢겨나가도 온몸으로 부딪히는 무대포 액션 맨. 송강호가 연기하는 윤태구의 몸짓에는 성룡으로 대변되는 중국계 액션 영화의 정신없는 동작과 슬랩스틱코미디의 소란스러움이 담겨있다. 그가 <붉은 돼지>의 포르코 롯소가 쓰고 나오는 파일럿 고글을 쓰고 오토바이를 탄 채 만주 벌판을 질주하는 광경은 어떻게 보면 참 생경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감독의 말을 빌리자면 1930년의 만주는 실로 다국적 인종들이 들끓던 무법천지였다고 하니, 어떻게 보면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의 모습은 역사의 진짜 일면이다.

밟히면 밟힐수록 두꺼워지는 배짱을 지닌 칠전팔기형 인간 태구. 그는 세 캐릭터 중 가장 한국적인 인물이다. <괴물>에서도 보여줬듯 ‘송강호표 연기’는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그게 가족이든 돈이든 물불을 가리지 않는 한국형 가장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할머니를 지키고 돈을 사수하는 모습에선 잡초처럼 질긴 생활력이, 또한 뒷일 생각하지 않고 일단 지르고 나서 수습하는 성격은 ‘빨리빨리’를 외치는 현대인의 성급한 일면이 보인다. 하지만 이게 태구가 가진 성격의 전부라면 그는 ‘좋은 놈’이지 ‘이상한 놈’이 아닐 것이다.

소박한(?) 꿈을 안고서 몸부림치는 태구에게 부는 즉 행복이다. 그는 돈이 목적이고, 돈만 있으면 1등자리도 마다한다. 아편굴에 끌려 갈만큼 어수룩하고 특유의 입담과 행동으로 관객을 웃음바다로 밀어 넣는 이상한 놈의 진가는 고글 너머 오토바이 너머에, 그러나 영화 속 어딘가에 꼭꼭 숨어있다. 어떻게 보면 진짜 무서운 놈은 창이가 아니라 태구 일지도 모른다.


서부 영화, 홍콩형 느와르의 오마주가 구석구석 보이는 <놈놈놈>의 질주. 외신은 스파게티와 마카로니를 비웃는 김치 웨스턴이라며 영화를 극찬했다. 감독은 액션 영화라는 틀 속에서 단순하게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인물과 사건의 단서들을 영화 곳곳에 밀도 있게 배치하는데 성공했다. 한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 대륙을 둘러싼 역사의 현장에 서부 영화의 코드를 차용한 영화는 그 어디에도 없는 21세기형 사료를 만들어낸 것이다. 스크린 가득 펼쳐지는 대자연 만주의 풍경 속에서 펼쳐지는 세 남자의 버라이어티 액션 대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딱 한 놈만 살아남든 세 놈 다 죽든, 이 영화에 나올 놈은 다 나왔다. 이제 당신이 영화의 네 번째 놈이 될 차례다.

월간 Spa Life 8월호 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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