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형은 진화한다.
어떻게 보면 각 개인은 나름의 원형이다.

이 와중에 모두가 '살면서 한 건 터트려야 하는데'라는 강박을 갖고 산다.
하지만 그런 생각 속에서, '한 건'이란 영원히 없다.
한 건을 터트리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에서 한 건이 시작된다.

한 점을 향해 꾸준한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한 건을 터트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시작된다.

정작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곳을 향한 차분하고 꾸준한 직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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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로카드  (2) 2009.09.15



예민한 친구가 있다. 육감이 발달했다고 하면 맞을까. 예술에 대한 끝없는 지적 탐구심을 가졌던 그 친구는 취미로 타로점을 치곤 했다. 그림을 전공한 그녀답게, 어린이 그림의 타로를 사용했다. 점은 대체로 놀라울 정도의 적중률을 자랑했다. 그녀의 점은 나의 취직을 예언했고, 두어달 전에 앞서 내가 만나게 사람들을 예언했다. 점을 보는 게 신나고 부러웠던 나도 카드를 사서 점을 보기 시작했다. 육감이 발달한 편은 아니었지만, 좋아하는 것은 나름대로 끝을 보기 좋아하던 나는 그 어렵고 많은 카드의 의미를 쓰고 외우기 시작했다. 아마 한자를 그렇게 공부했으면 지금 검정시험 2급 정도는 무난히 땄을지도 모른다.

허나 이럴수가. 타로 카드는 학문이었다. 재미로 시작했지만, 그것은 분명 학습의 과정이었다. 올컬러의 덱은 단순한 화보집이 아니었다. 소설창작실습 시간에 배우던 오대양 육대주를 아우르는 범세계적 원리, 동양의 사주, 그리고 음양오행과 생의 원리가 들어있었다. 72장이 한 덱이 되는 타로의 수트는 한 권의 고매한 신화집이었다.

그 후로 심심하면 타로점을 치는 날이 반복됐다. 타로는 한국 특유의 현지화된 종교적 강압성도 없는 데다가,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학문적 매력도 있었다. 허나 사이드 이펙트는 분명 있었다. 나는 점점 결과에 집착하게 되었고, 부정적인 카드가 나오면 남몰래 성을 냈다. 결국 나는 내 점을 스스로 보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원래 카드 치는 법의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둘이 칠 박수를 혼자 쳐서는 절대 좋은 소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자신과의 밀도 높은 대화가 부재한 날들이 반복되면 나는 조용히 책상다리를 하고서 타로덱을 꺼낸다. 책이 거는 말, 음악이 거는 말이 다르듯 타로 카드가 거는 말도 분명 다르다. 반복되는 생활에 짓눌린채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나의 내면을 발견하는 일은 썩 기쁘지 않지만, 사람의 성질을 탐구하는 일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대상이 나 자신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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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건을 터트리겠다는 생각을 버리는 데에서 한 건이 시작된다.

한 점을 향해 꾸준한 직선으로 나아가는 것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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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곳을 향한 차분하고 꾸준한 직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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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나 이럴수가. 타로 카드는 학문이었다. 재미로 시작했지만, 그것은 분명 학습의 과정이었다. 올컬러의 덱은 단순한 화보집이 아니었다. 소설창작실습 시간에 배우던 오대양 육대주를 아우르는 범세계적 원리, 동양의 사주, 그리고 음양오행과 생의 원리가 들어있었다. 72장이 한 덱이 되는 타로의 수트는 한 권의 고매한 신화집이었다.

그 후로 심심하면 타로점을 치는 날이 반복됐다. 타로는 한국 특유의 현지화된 종교적 강압성도 없는 데다가,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학문적 매력도 있었다. 허나 사이드 이펙트는 분명 있었다. 나는 점점 결과에 집착하게 되었고, 부정적인 카드가 나오면 남몰래 성을 냈다. 결국 나는 내 점을 스스로 보는 일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원래 카드 치는 법의의 원리에도 어긋나는 것이었다. 둘이 칠 박수를 혼자 쳐서는 절대 좋은 소리를 기대할 수 없었다.

하지만 요즘처럼 자신과의 밀도 높은 대화가 부재한 날들이 반복되면 나는 조용히 책상다리를 하고서 타로덱을 꺼낸다. 책이 거는 말, 음악이 거는 말이 다르듯 타로 카드가 거는 말도 분명 다르다. 반복되는 생활에 짓눌린채 가까스로 숨을 몰아쉬는 나의 내면을 발견하는 일은 썩 기쁘지 않지만, 사람의 성질을 탐구하는 일만큼 재미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대상이 나 자신이라면 더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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