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알기로 정이현이란 작가는 신경숙만큼(?)이나 유명하고+독자의 호불호가 뚜렷한 작가다. 사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회사 앞의 퀴퀴한 도서관에서 조우한 <달콤한 나의 도시>와의 만남은 반갑고도 알쏭달쏭했다. 작품을 읽기 전, 드라마는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등장인물의 외모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상상보다는 대입에 더 가까웠지만) 자꾸 지난 기억이 캐릭터에 대한 상상을 방해하는 바람에 슬며시 짜증이 샘솟기도 했다. 이래서 극을 본 후 원작은 읽는 것은 좋기도 싫기도 하다.

작가들이 자주 부정하는 게 있다면 등장인물과 원작자를 동일시 하는 관점일 터다. 하지만 정이현이라는 작가는 쿨하게도 작가보다는 오은수가 먼저 읽히고,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와, '쿨내난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혹여나 작가 후기가 단행본 출간 직전에 쓰여진 거라면 소설의 반응을 다이렉트로 얻으면서 이미 '넌더리'가 날대로 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이 소설은 J모 일보에 장기연재되었다.) 오은수의 뒤에 서고 싶던 작가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정이현은 초월적 소설쓰기에 통달한 대인배이거나, 사람에 질린 30대 여성이거나 둘 다 일 것 같다. 

30대가 되어도 지속되는 노골적 방황이 20대인 나의 살갗에 와닿는 기분은 짜릿하고도 홧홧했다. 이것이 20대를 위한 소설이라면 주인공 은수는 태오와 영수 사이에서 밀고 당기기를 하며 자존감 상승을 맛보았을 테지만 소설을 달랐다. 결말에서 묵묵히 홀로 떡볶이를 먹고 카페모카를 사먹는 은수의 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당연하게 느껴졌달까. 사회초년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랜 직장 생활을 해온 올드미스에 대한 경외심이 솟았달까. 아직 가지 않은 길을 다녀온 뒤 숨을 돌리는 그녀들을 보는 나의 눈은, 여권없는 고등학생이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촌 언니를 부러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죽도록 누군가에게 사랑받지도 않고,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는 그녀들은 올 겨울도 알파카 코트를 입고 MCM 가방을 든 채 충혈된 눈으로 도시형 고속버스를 탈 것이다. 뿌연 성에가 낀 종로의 밤거리. 입김을 불고 불어도 자꾸 뿌옇게 김이 차고 마는 기나긴 겨울. 그녀들의 30대란 교복쟁이들처럼 성에낀 버스 창문에 낙서를 하기 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나이인걸까. 여자의 30대란 꽃이 만개한 시기일까, 아직 개화기인지 장담할 수 없는 나이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자 문득 얼굴이 홧홧해지면서 멀지 않은 나의 30대가 슬금슬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들에 덤덤해지기엔 아직은 어설픈 20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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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 본문 중에서

  정한아의 글은 밝고 명랑하다.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무엇보다 젊다. 등단작 '나를 위해 웃다'때부터 그녀의 젊음은 항상 정직했다. 방황은 하되 비겁하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공중에 붕붕뜨기도 하고 리드미컬하게 춤도 추었다. 그렇게 성장한 서사는 결국 복숭아씨처럼 알차고 단단한 진실과 마주했다. 참, 다행이었다.

  이렇듯 건강하고 강인한 그녀의 글도 과거에는 치기어린 방황의 시절을 겪었을 테다. 그러한 것들에서 한 발짝 물러선 글 속에 사람의 향기가 앞선다. 무지와 무관심, 혹은 자의식 과잉과 지적 허영심 속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오늘날의 20대를 위한 지침이 정직하고 꼼꼼한 문장 속에 한 땀 한 땀 녹아있다. 이런 소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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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정이현이란 작가는 신경숙만큼(?)이나 유명하고+독자의 호불호가 뚜렷한 작가다. 사실 그녀의 작품을 제대로 읽어본 적이 없었기에 회사 앞의 퀴퀴한 도서관에서 조우한 <달콤한 나의 도시>와의 만남은 반갑고도 알쏭달쏭했다. 작품을 읽기 전, 드라마는 몇 번 본 적 있었기에 등장인물의 외모는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지만 (상상보다는 대입에 더 가까웠지만) 자꾸 지난 기억이 캐릭터에 대한 상상을 방해하는 바람에 슬며시 짜증이 샘솟기도 했다. 이래서 극을 본 후 원작은 읽는 것은 좋기도 싫기도 하다.

작가들이 자주 부정하는 게 있다면 등장인물과 원작자를 동일시 하는 관점일 터다. 하지만 정이현이라는 작가는 쿨하게도 작가보다는 오은수가 먼저 읽히고, 기억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와, '쿨내난다'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인가. 혹여나 작가 후기가 단행본 출간 직전에 쓰여진 거라면 소설의 반응을 다이렉트로 얻으면서 이미 '넌더리'가 날대로 났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로 이 소설은 J모 일보에 장기연재되었다.) 오은수의 뒤에 서고 싶던 작가에게는 죄송한 이야기지만 정이현은 초월적 소설쓰기에 통달한 대인배이거나, 사람에 질린 30대 여성이거나 둘 다 일 것 같다. 

30대가 되어도 지속되는 노골적 방황이 20대인 나의 살갗에 와닿는 기분은 짜릿하고도 홧홧했다. 이것이 20대를 위한 소설이라면 주인공 은수는 태오와 영수 사이에서 밀고 당기기를 하며 자존감 상승을 맛보았을 테지만 소설을 달랐다. 결말에서 묵묵히 홀로 떡볶이를 먹고 카페모카를 사먹는 은수의 모습은 처량하기 보다는 당연하게 느껴졌달까. 사회초년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오랜 직장 생활을 해온 올드미스에 대한 경외심이 솟았달까. 아직 가지 않은 길을 다녀온 뒤 숨을 돌리는 그녀들을 보는 나의 눈은, 여권없는 고등학생이 해외 배낭여행을 다녀온 사촌 언니를 부러워하는 것과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죽도록 누군가에게 사랑받지도 않고, 죽도록 누군가를 사랑할 수도 없는 그녀들은 올 겨울도 알파카 코트를 입고 MCM 가방을 든 채 충혈된 눈으로 도시형 고속버스를 탈 것이다. 뿌연 성에가 낀 종로의 밤거리. 입김을 불고 불어도 자꾸 뿌옇게 김이 차고 마는 기나긴 겨울. 그녀들의 30대란 교복쟁이들처럼 성에낀 버스 창문에 낙서를 하기 보다는 물끄러미 바라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드는 나이인걸까. 여자의 30대란 꽃이 만개한 시기일까, 아직 개화기인지 장담할 수 없는 나이일까. 소설을 다 읽고 나자 문득 얼굴이 홧홧해지면서 멀지 않은 나의 30대가 슬금슬금 걱정되기 시작했다. 지금의 나는 인생의 크고 작은 굴곡들에 덤덤해지기엔 아직은 어설픈 20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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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꿈꿔왔던 것에 가까이 가본 적 있어요? 그건 사실 끔찍하리만치 실망스러운 일이에요. 희미하게 반짝거렸던 것들이 주름과 악취로 번들거리면서 다가온다면 누군들 절망하지 않겠어요. 세상은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보다 멋이 떨어지죠. 현실이 기대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일찍 인정하지 않으면 사는 것은 상처의 연속일 거예요. 나중엔 꿈꿨던 일조차 머쓱해지고 말걸요." - 본문 중에서

  정한아의 글은 밝고 명랑하다. 건강하고 긍정적이며, 무엇보다 젊다. 등단작 '나를 위해 웃다'때부터 그녀의 젊음은 항상 정직했다. 방황은 하되 비겁하게 물러서는 법이 없었다. 넘어지고 부딪히고, 공중에 붕붕뜨기도 하고 리드미컬하게 춤도 추었다. 그렇게 성장한 서사는 결국 복숭아씨처럼 알차고 단단한 진실과 마주했다. 참, 다행이었다.

  이렇듯 건강하고 강인한 그녀의 글도 과거에는 치기어린 방황의 시절을 겪었을 테다. 그러한 것들에서 한 발짝 물러선 글 속에 사람의 향기가 앞선다. 무지와 무관심, 혹은 자의식 과잉과 지적 허영심 속에서 갈대처럼 흔들리는 오늘날의 20대를 위한 지침이 정직하고 꼼꼼한 문장 속에 한 땀 한 땀 녹아있다. 이런 소설이 있어서 참,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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