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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캣츠비'와 '선'의 호시절 (=사진 제공:다온커뮤니케이션)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연애 스토리,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세상은 멀티태스커를 원한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넘어서, 사랑도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잘 하는 연애는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못하는 연애는 능멸과 모욕을 받는다. 세상은 잔혹하고 연애는 지옥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곤 한다. 이렇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수만 가지 감정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 <위대한 캣츠비>를 소개한다.

미국 작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 같은 강도하 원작의 본 작품은, 지난 2005년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가 시작된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웹툰이다. 웹이라는 한정된 공간적 제약을 깨고 영상미 넘치는 표현으로 찬사를 받은 이는 그해 대한민국 만화대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드라마, 뮤지컬, 갈라 콘서트 등으로 제작되며 꾸준한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뮤지컬로서는 어느덧 시즌3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 <위대한 캣츠비>. 이 작품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라는 보편적인 정서

아담과 이브가 저주를 받고도 서로를 사랑했듯, 연애는 인간사 최대의 화두다. ‘사랑하지 않는 자, 죽어버려라’라는 다소 끔찍한(?) 말이 있듯 표현이 조금 과잉될 경우엔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처럼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말이 무색하게 인물들은 집착과 연정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특정 대상을 갈구한다.

주인공인 만년백수 캣츠비와 페르수는 대학시절부터 6년간 연인 관계였으나 페르수가 재혼남과 결혼하면서 이별을 맞이한다. 캣츠비의 룸메이트이자 동기인 하운두는 과외선생을 시작한 뒤 학부형인 몽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캣츠비에 다가온 여자 선은 그에게 순수한 감정을 쏟는데 여념이 없다. 올바른 사랑이든 비뚤어진 사랑이든 인물들은 모두가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극중 주요 캐릭터들의 나이는 26세로 설정되어있다. 의욕이 앞서는 열정에서 벗어나 결혼을 생각할 시기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덜 익었다. 표현 방식에서는 열여섯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에 극은 덜 자란 만큼 충돌이 많은 20대의 사랑만을 다루지 않는다. 조연들의 나이를 보자. 몽부인은 30대, 페르수의 남편 부르독은 40대, 몽영감은 50대다. 이러한 나이 설정에서 20대의 사랑과는 다른,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인물들의 사랑 방식이 드러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조연들의 사랑방식은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몽부인은 육감적이고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지만 원작의 몽부인은 인자하고 안정된, 오히려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또한 전자의 몽영감은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만화적인 캐릭터이나, 원작에서의 그는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중년 남성으로 그려진다. 둘은 원작에서 뮤지컬로 가는 과정에서 성격의 표현됨이 가장 많이 달라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만국의 공통 언어다. <위대한 캣츠비>는 사랑의 깊숙한 지점에 이른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0대의 철부지들의 사랑,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자극이 필요한 30대 주부의 사랑, 곁에 있는 이에게 집착을 보이는 40대 재혼남의 사랑, 상대에게 관대해지는 50대의 사랑까지, 극은 겹쳐진 셀로판지 같은 여러 톤의 목소리로 각자의 사랑 방식을 이야기한다. 연령이든 방법이든 어떠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지독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다.


이런 일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있을 법한

눈여겨 볼 것이 또 하나 있다. 이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들의 배치에 대한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약한 캣츠비는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을 닮았고, 캣츠비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선은 춘향이다. 반면에 사랑은 종교라며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하운두는 일편단심형 카사노바며, 남편 부르독과의 관계에서 도피하며 캣츠비에게 ‘나도 동시에 사랑해줘’라고 당당하면서도 처절한 대사를 내뱉는 페르수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관념을 철저히 무시하는 반(反) 테스적 성향을 보여준다. 이렇게 <위대한 캣츠비>는 과거형의 캐릭터를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의 애정 관계에 녹아냈다는 점에서 온고지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 캐릭터들은 고전의 단순한 답습에 그치지 않고, 상황이나 반전 속에서 변모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가령 선이 캣츠비를 향해 모성애적인 사랑을 보인다든지, 하운두의 사랑의 비밀이 밝혀진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위대한 캣츠비>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극이다. 삼각, 사각으로 얽힌 관계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충분한 가십거리가 될 만큼 복잡하다. 하지만 자칫 중구난방으로 그려질 수도 있는 관계망을 원작에서는 섬세한 감정 터치로, 뮤지컬에서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영상의 문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특히 인물들이 핀 조명 아래에서 펼치는 합창 신과 모노드라마처럼 비운에 젖어 부르는 노래들은 가요처럼 쉽게 귀에 붙는다. 또한 익숙한 일러스트들이 컴퓨터 그래픽 효과로 처리되는 것은 시각적 효과를 더함과 동시에 원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의 프로방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자신의 빈자리가 허전해서 누군가를 찾는 건 사랑의 초기에 경험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자신의 공란은 자기 자신만이 채울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빠지고 알면서도 다치고 알면서도 갈구한다. 이렇듯 사랑은 공포영화이자 롤러코스터다. 공포를 예견하면서도 도전하게 되는 모험이다. 하지만 사랑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다. 이는 절벽 사이에 걸쳐진 다리처럼 불안하게 삐걱거리다가도, 솜이불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혹자는 사랑도 상품이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해봤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굳게 믿는다. 이렇듯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법의 묘약, 익숙한 듯 낯설게 뒤엉킨 백가지 사랑의 맛을 <위대한 캣츠비>에서 느껴보자. 극 중 캣츠비와 선이 상상하는 ‘프로방스’가 프랑스의 진짜 프로방스든, 재개발 지구에 세워진 아파트의 외래식 이름이든 영영 그 곳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건 과정 자체가 목적이라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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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연애 스토리,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 midnight madn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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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캣츠비'와 '선'의 호시절 (=사진 제공:다온커뮤니케이션)

천국과 지옥을 넘나드는 연애 스토리, 뮤지컬 <위대한 캣츠비>


세상은 멀티태스커를 원한다. 잘 먹고 잘사는 것을 넘어서, 사랑도 잘하는 사람이 인정받는다. 잘 하는 연애는 동경의 대상이 되지만 못하는 연애는 능멸과 모욕을 받는다. 세상은 잔혹하고 연애는 지옥이다. 이를 알면서도 우리는 본의로, 혹은 본의 아니게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곤 한다. 이렇듯 누군가를 사랑하는 순간에 느껴지는 수만 가지 감정들을 세밀하게 그려낸 작품 <위대한 캣츠비>를 소개한다.

미국 작가 피츠제럴드의 소설 <위대한 개츠비>의 제목을 패러디한 것 같은 강도하 원작의 본 작품은, 지난 2005년 포털 사이트 다음에서 연재가 시작된 후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던 웹툰이다. 웹이라는 한정된 공간적 제약을 깨고 영상미 넘치는 표현으로 찬사를 받은 이는 그해 대한민국 만화대상을 수상하였고 이후 드라마, 뮤지컬, 갈라 콘서트 등으로 제작되며 꾸준한 마니아를 만들어냈다. 뮤지컬로서는 어느덧 시즌3의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는 <위대한 캣츠비>. 이 작품이 그토록 많은 사람의 가슴을 울린 이유는 무엇일까.


연애라는 보편적인 정서

아담과 이브가 저주를 받고도 서로를 사랑했듯, 연애는 인간사 최대의 화두다. ‘사랑하지 않는 자, 죽어버려라’라는 다소 끔찍한(?) 말이 있듯 표현이 조금 과잉될 경우엔 연애를 하지 않는 사람은 죄인처럼 치부되기 십상이다. 이러한 말이 무색하게 인물들은 집착과 연정이 뒤섞인 감정 속에서 특정 대상을 갈구한다.

주인공인 만년백수 캣츠비와 페르수는 대학시절부터 6년간 연인 관계였으나 페르수가 재혼남과 결혼하면서 이별을 맞이한다. 캣츠비의 룸메이트이자 동기인 하운두는 과외선생을 시작한 뒤 학부형인 몽부인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캣츠비에 다가온 여자 선은 그에게 순수한 감정을 쏟는데 여념이 없다. 올바른 사랑이든 비뚤어진 사랑이든 인물들은 모두가 사랑이라는 것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극중 주요 캐릭터들의 나이는 26세로 설정되어있다. 의욕이 앞서는 열정에서 벗어나 결혼을 생각할 시기다. 하지만 이들의 사랑은 덜 익었다. 표현 방식에서는 열여섯의 그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에 극은 덜 자란 만큼 충돌이 많은 20대의 사랑만을 다루지 않는다. 조연들의 나이를 보자. 몽부인은 30대, 페르수의 남편 부르독은 40대, 몽영감은 50대다. 이러한 나이 설정에서 20대의 사랑과는 다른, 그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인물들의 사랑 방식이 드러난다. 하지만 뮤지컬에서 조연들의 사랑방식은 조금 다르게 그려진다. 몽부인은 육감적이고 섹시한 여성의 이미지지만 원작의 몽부인은 인자하고 안정된, 오히려 어머니 같은 느낌이다. 또한 전자의 몽영감은 발랄하고 통통 튀는 만화적인 캐릭터이나, 원작에서의 그는 꿍꿍이를 알 수 없는 중년 남성으로 그려진다. 둘은 원작에서 뮤지컬로 가는 과정에서 성격의 표현됨이 가장 많이 달라진 캐릭터라고 할 수 있다.

사랑은 만국의 공통 언어다. <위대한 캣츠비>는 사랑의 깊숙한 지점에 이른 이들의 모습을 그려낸다. 20대의 철부지들의 사랑, 안정기에 접어들었지만 자극이 필요한 30대 주부의 사랑, 곁에 있는 이에게 집착을 보이는 40대 재혼남의 사랑, 상대에게 관대해지는 50대의 사랑까지, 극은 겹쳐진 셀로판지 같은 여러 톤의 목소리로 각자의 사랑 방식을 이야기한다. 연령이든 방법이든 어떠한 것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가장 궁극적인 것은 아름다우면서도 동시에 지독한, 사랑이라는 감정 자체다.


이런 일이 과연 있을까? 그러나 있을 법한

눈여겨 볼 것이 또 하나 있다. 이는 다양한 연령층의 사랑을 보여주는 것과는 다른, 어디선가 본 듯한 캐릭터들의 배치에 대한 것이다. 우유부단하고 사랑에 대한 확신이 약한 캣츠비는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하는 햄릿을 닮았고, 캣츠비 한 사람만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선은 춘향이다. 반면에 사랑은 종교라며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는 하운두는 일편단심형 카사노바며, 남편 부르독과의 관계에서 도피하며 캣츠비에게 ‘나도 동시에 사랑해줘’라고 당당하면서도 처절한 대사를 내뱉는 페르수는 사회가 여성에게 요구하는 관념을 철저히 무시하는 반(反) 테스적 성향을 보여준다. 이렇게 <위대한 캣츠비>는 과거형의 캐릭터를 21세기 한국의 젊은이들의 애정 관계에 녹아냈다는 점에서 온고지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이들 캐릭터들은 고전의 단순한 답습에 그치지 않고, 상황이나 반전 속에서 변모하는 모습까지 보여준다. 가령 선이 캣츠비를 향해 모성애적인 사랑을 보인다든지, 하운두의 사랑의 비밀이 밝혀진다든지 하는 것 말이다.

<위대한 캣츠비>는 상당히 드라마틱한 극이다. 삼각, 사각으로 얽힌 관계는 주변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하면 충분한 가십거리가 될 만큼 복잡하다. 하지만 자칫 중구난방으로 그려질 수도 있는 관계망을 원작에서는 섬세한 감정 터치로, 뮤지컬에서는 속도감 있는 전개와 영상의 문법을 도입하는 것으로 깔끔하게 정리된다. 특히 인물들이 핀 조명 아래에서 펼치는 합창 신과 모노드라마처럼 비운에 젖어 부르는 노래들은 가요처럼 쉽게 귀에 붙는다. 또한 익숙한 일러스트들이 컴퓨터 그래픽 효과로 처리되는 것은 시각적 효과를 더함과 동시에 원작의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사랑의 프로방스, 그곳에 무엇이 있기에

자신의 빈자리가 허전해서 누군가를 찾는 건 사랑의 초기에 경험하는 것이라고들 한다. 자신의 공란은 자기 자신만이 채울 수 있다는 소리다. 하지만 우리는 알면서도 빠지고 알면서도 다치고 알면서도 갈구한다. 이렇듯 사랑은 공포영화이자 롤러코스터다. 공포를 예견하면서도 도전하게 되는 모험이다. 하지만 사랑만큼 아이러니한 것도 없다. 이는 절벽 사이에 걸쳐진 다리처럼 불안하게 삐걱거리다가도, 솜이불처럼 따뜻하고 편안한 안식처가 되어주기도 한다.

혹자는 사랑도 상품이 되는 세상이 되는 것이 우려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을 해봤다고 자처하는 이들은 보이지 않는 것의 힘을 굳게 믿는다. 이렇듯 사랑의 힘은 위대하다.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마법의 묘약, 익숙한 듯 낯설게 뒤엉킨 백가지 사랑의 맛을 <위대한 캣츠비>에서 느껴보자. 극 중 캣츠비와 선이 상상하는 ‘프로방스’가 프랑스의 진짜 프로방스든, 재개발 지구에 세워진 아파트의 외래식 이름이든 영영 그 곳이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다. 모름지기 사랑이란 건 과정 자체가 목적이라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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